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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동 죽동 마을 분성 배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83
한자 駕洛洞竹洞-盆城裵氏世居地
영어의미역 Garak-dong Bunseong Bae Ancestral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죽동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약 10가구
세거지 가락동 죽동 마을 분성 배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죽동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에 있는 분성 배씨 세거지.

[개설]

배씨(裵氏)는 신라 6부 촌장 중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陀)를 원조로 하였으나 고증할 자료가 전하지 않아 고려 개국 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분성 배씨(盆城裵氏)의 시조 배원룡(裵元龍)배현경의 4세손인 가락군(駕洛君) 배사혁(裵斯革)의 큰아들이며, 공민왕 때 병부 상서 겸 도원수로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가문의 인물로 분성군 배원룡의 큰아들 배서(裵署)가 감무 어사(監務御使) 전객령(典客令)을 지냈고, 둘째 아들 배종주(裵宗柱)는 전리 판서(典理判書), 배서의 아들 배단(裵端)은 평장사(平章事)에 오르는 등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강서구 가락동분성 배씨 세거지는 죽림 마을, 죽동 마을, 송산 마을에 있다.

[명칭 유래]

죽동(竹洞)이란 이름은 대나무가 많아 붙여졌다.

[형성 및 변천]

가락 죽도는 원래 무인도로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된 지역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민간인 출입 금지가 해제되었다. 이에 1600년경 분성군 배원룡 15세손인 배덕민의 큰아들 종사랑(從仕郞) 배영채(裵永採)와 둘째 아들 진사 배영록(裵永祿)이 죽동 마을에 정착하여 410여 년을 세거하고 있다.

배원룡의 14세손 눌장(訥莊) 배덕민(裵德民)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배지상(裵智祥)이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자 아버지를 업고 산중에 은거하면서 공양하였다. 이때 왜적(倭敵)이 갑자기 나타나 위협하며 굴복을 강요하자 배지상이 “나는 오직 우리나라의 신하요 백성이거늘 어찌 너희 같은 무리들을 섬길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적이 칼을 들어 아버지를 해치려는데 마침 숲에 나무하러 갔던 배덕민이 돌아와 그 광경을 보고 달려들어 적을 주먹으로 밀치고는 자신의 몸으로 아버지의 몸을 감싸고 적의 칼과 창으로부터 아버지를 보호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부자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적들이 물러가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능히 당대의 충신이고 아들은 능히 당대의 효자라 할 것이니, 진실로 동방(東邦)의 충효(忠孝) 예의(禮義)의 귀감이다”라면서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덕민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다. 후손 중에는 항일 투사 배종철(裵鍾哲)과 음악가 배도순(裵道淳)이 있다.

[자연 환경]

죽동 마을서낙동강의 서쪽에 있는 오봉산의 북쪽 비탈에 자리한다. 마을의 북쪽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현황]

집안의 사당인 침천재(枕泉齎) 충효각(忠孝閣)에서 배덕민을 모시고 있다. 죽동 마을분성 배씨가 20여 가구 살았으나, 2013년 현재는 10가구 남짓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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