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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동 남평 문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513
한자 釜谷洞南平文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Nampyeong Mun Clan in Bugok-d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진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부곡동 남평 문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는 남평 문씨 세거지.

[개설]

472년(자비왕 5) 2월에 전라남도 남평현 동쪽 장자지(長者池)에 자색의 서기가 있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신하가 가서 보니 큰 바위 위에 석함(石函)이 있고, 그 속에 아이가 있었는데 함 면에 ‘문(文)’ 자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비왕이 그 아이를 문씨로 사성(賜姓)하여 문다성(文多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후 문다성은 500년(지증왕 1) 중시 아찬(中侍阿飡)이 되었고, 540년(진흥왕 1) 대국사, 577년(진지왕 2) 식읍 3,000호를 받았다. 대광보국 상주국 삼한 벽상 공신 대사마 대장군 태사 태부(大匡輔國上柱國三韓壁上功臣大司馬大將軍太師太傅)에 추증되고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추봉되었다.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의 장연 서원에서 매년 음력 9월에 향사한다.

[형성 및 변천]

상계(上系)는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잘 알 수 없어 경절공 문익(文翼)을 중시조로 한다. 문익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선종 때 좌승선 겸 어사대사(左承宣兼御史臺事)로 승진하였다. 1098년(숙종 3) 좌복야(左僕射)가 되었고,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로 서북면 병마사를 지냈다. 당시 불교가 성행하였는데 이를 반대하고 유교의 진리를 탐구하였다. 강종 때 상주국 평장사에 추증되고 풍산군(楓山君)에 봉해졌다.

문익의 10세손 충정공 문숙선(文叔宣)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이다. 문익점은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이 문중실(文中實)로 의안공파(毅安公派)의 파조이다. 문중실의 다섯 아들 중 넷째인 문평(文苹)이 동래 입향조이다. 문평은 두 아들을 두었고, 큰아들 문어동(文圉仝)은 경상남도로, 둘째 아들 문우원(文遇元)은 동래파 종중을 이루었다.

문우원의 증손·고손 대에 가서 서원집[문왕주(文旺周)]·성안집[문택주(文宅周)]·사상집[문응필(文應弼)]·초읍집[문응규(文應奎)]·북면집[문응기(文應箕)]·금사집[문응봉(文應鳳)]·거벌집[문응린(文應麟)]·반여집[문환(文煥)]·대조집[문항(文抗)]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선무 원종공신을 배출한 집안은 초읍집에서 문도명(文道明), 북면집에서 문택룡(文澤龍), 거벌집에서 문세휘(文世輝), 대조집에서 문덕겸(文德謙)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동래 충렬사에서 배향하고 있다.

북면에는 문평의 4세손 문응기(文應箕)가 입향조이다. 문응기의 손녀[윤장의 딸]가 임진왜란 공신 죽산 박씨(竹山朴氏) 인묵재 박천추의 부인이다. 박천추는 임진왜란 공신 문택룡의 매부이기도 하다. 문택룡은 지금의 동래구 사직동 월복(月伏)에 거주하였다. 문택룡은 세 아들 문여욱(文汝郁)·문시욱(文是郁)·문이욱(文以郁)을 두었다.

문여욱은 병자호란 이후 동래 월복에서 기장 철마로 이주하여 왔는데,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여 그의 후손들이 기장의 향반으로 세거하였다. 『동래군지(東萊郡誌)』에 의하면, 문여욱은 병자호란 당시 동래 부사 정양필(鄭良弼)에게 의병 봉기를 주장하였다가 거부당한 뒤 동래성 아래에서 단식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동래를 떠나 기장의 철마 웅천에 있는 거문산 홍류동(紅流洞) 계곡에 은거하며,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문여욱은 네 아들 문상규(文尙奎)·문상익(文尙翼)·문상벽(文尙壁)·문상두(文尙斗)와 딸 하나가 있었는데, 문상익은 문여욱과 같이 철마 웅천으로 이거하였다. 문상벽과 문상두는 동래 향안, 문상익과 그의 큰아들 문희성(文希聖)은 기장 향안에 입록되어 있다.

22세 문상익은 문희성(文希聖)·문재성(文載聖)·문취성(文就聖) 세 아들을 두었으며, 23세 문재성은 동래 북면 두구동[임석동]으로 이거하여 세 아들 문세흠(文世欽)·문세표(文世標)·문세항(文世恒)을 두었다. 24세 문세흠의 막내아들 문명록(文命祿)이 18세기 말에 동래 북면 오륜대로 이거하여 독자인 문도빈(文道彬)을 두었다. 26세 문도빈은 좌수·서원장을 역임하였고, 1813년 동래 향교 대성전 상량문을 쓰기도 하였다. 문도빈은 세 아들 문병상(文秉常)·문병조(文秉朝)·문병희(文秉喜)를 두었다.

27세 문병상은 안락서원장을 역임하였고, 문시봉(文始鳳)과 문유봉(文有鳳) 두 아들을 두었다. 문유봉은 좌수, 향교 전교 및 안락서원장을 지냈다. 문유봉의 아들 문원주(文元周)는 안락서원장, 문식주(文湜周)는 직원(直員)[전교]을 역임하였다.

27세 문병조는 1882년 동래 향교 석전제(釋奠祭)에 분헌관(分獻官)으로 참여하였고, 문진봉(文振鳳)·문장봉(文章鳳)·문치봉(文致鳳) 세 아들과 딸 둘을 두었다. 문치봉은 도유사를 지냈고, 문장봉은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는데 둘째 딸 문연옥(文聯玉)은 『동래군지』에 양원(良媛)으로 기록되어 있다.

27세 문병희는 좌수 및 교원 반수(校院班首)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문관봉(文官鳳)은 향교 전교 및 안락서원장을 지냈다. 문관봉의 아들 문기주(文錡周)는 안락서원장을 지냈으며, 1937년 『동래군지』를 발간하였다. 문기주의 동생 문지석(文智石)은 전교를 역임하였다. 문병희의 문도 제자들이 그를 추원하여 후원재(厚遠齋)를 금정구 오륜동에 건립하고 고을 유림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후에 폐지되었고, 지금은 문병희의 후손이 관리한다. 현대 인물로는 문병조의 증손 문두광(文斗光)이 서면 북성 극장·범내골 조선 어망 등의 사업을 펼쳐, 한때 부산의 3대 부자[김지태·하원준·문두광]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자연 환경]

오륜대 수원지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해발 고도 150m가량의 작은 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해발 고도 70m의 통미골이 있다. 마을은 두 산지 사이에 위치한다.

[현황]

후원재는 교원 반수를 지낸 문병희의 문도 제자들이 그를 추원하여 1920년대에 금정구 오륜동에 건립하여 고을 유림제를 지냈으나, 1970년대 초에 폐지되고 지금은 문병희의 후손이 관리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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