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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동 중신 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511
한자 鳴旨洞中新-南平文氏世居地
영어의미역 Myeongji-dong Nampyeong Mun Ancestral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중신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명지동 중신 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중신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었던 남평 문씨 세거지.

[개설]

남평 문씨(南平文氏)의 대동보(大同譜)로 가장 오래된 신해보[1732년, 영조 3]에 의하면, 남평 문씨의 시조인 문다성(文多省)은 통일 신라 말에 태어나 왕건(王建)을 도와 개국 공신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다성의 아들 문탁(文倬)이 문하시랑(門下侍郞) 찬성사(贊成事) 상주국(上柱國) 태사(太師)·태부(太傅)이었고, 이후 남천강(南天降)·남주백(南周伯)·남승조(南承祖)·남성화(南聖和)·남인걸(南仁傑)·남지원(南智遠)·남정(南挺)·남중달(南仲達)·남극유(南克裕)·남효제(南孝悌)·남장창(南章昶)·남정(南正) 등 12세를 기록하였으나 고증하기 어려워 고려 헌종(獻宗) 때 상주국 평장사(上柱國平章事)를 지낸 경절공(敬節公) 문익(文翼)을 중시조 1세로 하였다.

2세 문공유(文公裕)가 북병마사(北兵馬使)와 형부 상서 및 예부 상서를 지냈고, 3세 문극겸(文克謙)은 고려 의종(毅宗)·명종(明宗)에 걸친 중신으로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감수국사(監修國史)·태사·태부를 지냈으며, 4세 문후식(文侯軾)은 태부경 동북면 지병마사(太夫卿東北面知兵馬使)를 지냈고, 5세 문정(文挺)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을 지냈으며, 6세 문중연(文仲連)은 벽상 공신 상주국 문하시랑(壁上功臣上柱國門下侍郞)을 하였고, 8세 문득준(文得俊)은 탐라(耽羅) 해적을 토평(討平)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그리고 9세 문극검(文克儉)은 사의대부(司儀大夫)·개성 부윤(開城府尹)을 하였으며, 10세 문윤각(文允恪)은 충혜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 우사 문한 학사(三司右使文翰學士)를 지냈고, 11세 문숙선(文叔宣)은 공민왕 때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와 좌정언(左正言) 및 지제교 사간원 헌납(知製敎司諫院獻納)을 지냈다. 문숙선의 아들 12세 문익점(文益漸)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강 대학 박사(藝文館直講大學博士)에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내고 좌사의대부 우문관 제학(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을 지내면서 중국에 갔다 돌아올 때 목화씨를 가져와서 우리나라 최초로 무명베를 입게 하였다. 남평 문씨는 이 외에도 대를 이어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명칭 유래]

명지면(鳴旨面)에 새로 만들어진 염전(鹽田)이라고 신전리(新田里)로 하였으며, 신전리명지면을 중심으로 상신(上新)·중신(中新)·하신(下新)으로 마을 단위를 구분하였는데 중신 마을신전리의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형성 및 변천]

남평 문씨 중시조 상서 평장사(尙書平章事) 경절공 문익의 23세손 장사랑(將仕郞) 문열생(文烈生)이 1650년대에 김해로 이주하여 관간재(觀澗齋)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강서구 명지동 중신 마을에는 중시조 문익의 25세손 통덕랑 문덕량(文德良)[1636~1696]의 묘소가 녹산면 산양 마을 임곡에 있는 것으로 보아 명지 입향조로 보이나, 문덕량의 아들 문후시(文厚始)와 손자 문태윤(文泰允)의 묘소가 경상북도 현풍(玄風) 도동과 대구 달성(達城)에 있어 내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문덕량의 증손자 28세손 문상재(文常在)[?~1754]의 묘소가 녹산 산양 마을에 있어 이를 기준으로 하면 1700년대 초반 숙종~영조 대에 명지로 입향한 것으로 보인다. 명지에 염전이 생기기 이전부터 정착한 집안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 환경]

중신 마을은 서쪽으로 서낙동강, 동쪽으로 낙동강에 둘러싸인 명지도의 중앙부에 자리한다. 마을은 평지 가운데에 자리하고, 마을 북쪽으로 수로가 있고 서쪽으로 소하천이 지나간다.

[현황]

남평 문씨가 한창 번성할 때는 중신 마을을 중심으로 하신 마을평성 마을 등에 20~30가구 넘게 살았으나 300여 년 세거해 온 지금은 명지 신도시 조성으로 중신 마을, 하신 마을, 평성 마을이 다 철거되고 집안도 뿔뿔이 흩어져서 현황을 파악할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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