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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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岫里寧越辛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Yeongwol Sin Clan in Yeongsu-ri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진봉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었던 영월 신씨 세거지.
[명칭 유래]
용수리는 1914년 덕전동과 산막동 및 평전동·가동을 통폐합하여 붙인 명칭으로, 정확한 지명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4개 마을이 모두 조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조룡산의 ‘용(龍)’ 자와 산부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뫼부리 수(岫)’ 자를 합하여 붙인 이름으로 추정한다.
[형성 및 변천]
영월 신씨(寧越辛氏) 시조 신경(辛鏡)은 고려 예종(睿宗) 때 사람으로 인종(仁宗) 연간 평장사를 지냈다. 22세손인 신옥(辛沃)이 조선 선조(宣祖) 연간에 지금의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로 이주하였다. 신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발(鄭撥) 장군 휘하에서 싸우다 순절하였고, 조정에서는 통정대부 공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그의 아들 23세 신기운(辛起雲)은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듣고 13세 어린 나이에 부산진성으로 돌격하다 포로가 되어 왜로 끌려갔다. 신기운은 7년 후 19세 때 왜에서 탈출하여 울릉도 근해에서 구조되어 부산으로 귀환하였고, 그 후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24세손이 신안도(辛安道)이고, 25세손은 신율(辛嵂)·신수다. 신수의 아들이 신상문(辛尙文), 신상두(辛尙斗), 신상장(辛尙章), 신상벽(辛尙璧)이다. 이 가운데 신상벽의 아들인 27세 월천(月泉) 신오(辛澳)[1714~1786]가 기장의 거유(巨儒)다. 이전부터 정관읍 용수리에는 용산재가 있어 지역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1733년(영조 9) 기장 현감 권적(權擿)이 부임하면서 당시 용산재 강사였던 신오가 절친했던 권적의 도움을 받아 용산재를 크게 진흥시켰다. 신오가 찬한 용산재의 상량문과 상량가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유집도 남아 있다.
34세 신두성(辛斗星)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장안면 좌천 장날에 있었던 독립 만세 운동에 다섯 명의 주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하여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8개월가량 옥고를 치렀고, 그 공적을 기려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자연 환경]
용수리 북동쪽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병산리에서 발원한 좌광천이 이곳을 지나 동쪽으로 흐른다. 좌광천 주변으로 평지가 나타나 농경지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정관 신도시 개발로 일부 지역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현황]
영월 신씨는 근래까지 매학리에 32가구, 용수리 일대에 34가구가 살았지만 정관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대부분 없어지면서 흩어지고, 2013년 현재는 일부가 인근 구연 마을 등지에서 살고 있다. 용수리 가동 마을 신씨들로 구성된 가동 문중은 정관읍 정관중앙로 201-9에 재실을 갖추고 있으며, 정관읍 신씨 대문중은 정관읍 방곡로 55-4에 다산정을 신축하였다. 다산정에는 입향조 신옥과 그의 아들 신기운, 27세 신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