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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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巨堤洞南平文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Nampyeong Mun clan in Geoje-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에 있는 남평 문씨 세거지.
[개설]
거제동의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동래에 처음 들어온 남평 문씨 의안공파(毅安公派) 문평(文苹)의 후손들이며, 거벌파(巨閥派), 거벌 문중이라고 불린다. 『남평 문씨 동래 거벌파보』에 따르면, 문평의 후손은 동래[부산] 각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는데 서원(書院)집, 성안(城案)집, 사상(沙上)집, 사하(沙下)집, 초읍(草邑)집, 북면 미동(北面微洞)집, 사천(絲川)집, 거벌(巨閥)집, 반여(盤如)집으로 구분하여 부산에서의 남평 문씨 세거 현황을 알 수 있다. 사천집과 거벌집은 각각 31세인 문응봉(文應鳳)과 문응린(文應麟) 형제의 후손들이다. 문응린의 아들인 문세광(文世光)과 문세휘(文世輝) 가운데 문세휘의 아들인 10형제를 거벌집으로 묶고 있다. 문세휘는 임진왜란 공신으로 동래 충렬사에서 배향하고 있다.
[명칭 유래]
‘거제(巨堤)’라는 지명은 이곳에 축조된 큰 제방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시대 이곳의 지명은 거벌리(居伐里)였다. 거벌(巨伐)로도 표기되었으며, ‘큰 벌’을 뜻하는 평야를 의미한다. 지금의 거제동과 연산동 일대에 펼쳐 있는 넓은 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상습 침수 지역이었던 이곳에 제방을 쌓으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형성 및 변천]
문세휘의 아들 10형제 중에 거제동에 처음 들어온 것은 17세기 33세인 문윤질(文允質)이다. 문윤질의 생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남평 문씨 동래 거벌파보』에 따르면 그의 형인 문종질(文宗質), 문상질(文尙質)이 각각 1597년(선조 30), 1604년(선조 37)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어 그 생몰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거제동에 남평 문씨가 세거한 것을 추정해 보면 350년을 훌쩍 넘는다.
[자연 환경]
거제동 서쪽으로 금정봉[399m]과 금용산[150m], 화지산[200m]을 잇는 산지가 에워싸고 있다. 산록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동쪽으로 흘러 온천천으로 유입하며 유역에 넓은 평지를 이룬다. 대부분 주거지로 이용되고 있다.
[현황]
2014년 현재 거제동에는 남평 문씨 약 10여 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남평 문씨는 동래에 입향한 지 오래됐고 선조가 임진왜란 공신인 만큼 향사(享祀)도 다양하게 치르고 있다. 거벌 문중은 해운대구 반송동에 운송재(雲松齋)란 재실을 두고 있고, 이곳에 상의사(尙義祠)란 사당도 별도로 지어 두었다. 상의사에서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문덕겸(文德謙)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문세휘(文世輝)를 배향하는데, 임진왜란 때 동래성이 함락된 날짜에 맞추어 매년 음력 4월 14일 향사를 지낸다. 이때는 동래 향교(東萊鄕校) 유림을 비롯한 남원 양씨(南原梁氏), 여산 송씨(礪山宋氏), 경주 김씨(慶州金氏), 강릉 김씨(江陵金氏) 등이 제관으로 참여하여 향사를 함께 치른다.
문덕겸의 묘사(墓祀)는 거벌 문중이 음력 10월 1일에 따로 지낸다. 문덕겸 묘는 동래구 온천동 달북골 광주 김씨(廣州金氏) 재실인 향경재(鄕敬齋) 옆에 있는 구릉에 있고, 묘 앞에는 문덕겸의 충렬비와 충렬각(忠烈閣)이 세워져 있다. 또한 음력 10월 8일에 온천동에서 도화반 묘사, 음력 10월 10일에 운송재에서 묘사를 거행하고 있다. 그 외 거벌 문중은 동래 입향조인 문평을 배향하는 금정구 남산동 동성재(東成齋) 제사에도 참여한다. 남평 문씨 거벌 문중은 거제 2동 거평씨족회의 일원으로, 매년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당산제도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