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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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菉山洞南陽洪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Noksan-dong Namyang Hong Ancestral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범방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는 남양 홍씨 세거지.
[개설]
610년경 출생으로 추정되는 홍천하(洪天下)는 643년에 고구려 보장왕의 주청에 따라 당 팔학사(八學士)의 수장으로 고구려에 파견되어 당성(唐城)[남양(南陽)의 옛 이름]에 정착하였다. 645년 신라와 당나라 전쟁으로 지리산 덕산촌(德山村)으로 피난하니 신라에서 덕산 촌주(德山村主)로 봉하여 머물게 하였다. 홍천하가 김유신(金庾信)과 설총(薛聰)에게 유학(儒學)을 전수하여 예절 교육이 널리 퍼지고 유학이 진작되었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토홍계(土洪系)의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당성에 세거(世居)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高宗) 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漿)을 지냈다. 홍선행의 선계(先系)는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당성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으므로 홍선행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온 것으로 전한다.
[명칭 유래]
범방(凡方)의 원래 한자 표기는 범방(泛舫)인데, 금병산(錦屛山)의 지세가 배가 나아가는 행주형(行舟形)이라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이후 범방의 한자 표기가 지금과 같이 바뀌었다.
[형성 및 변천]
녹산동 남양 홍씨 세거지는 입향조(入鄕祖)인 고려 일등 개국 공신 태사공 홍은열(洪殷悅)의 16세손 남양군(南陽君) 홍잠(洪潛)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선조에게 강직하게 상소하였다가 김해로 유배되어 숨을 거두고, 그 후손들이 녹산 범방에 정착하며 형성되었다. 홍잠의 손자 18세손 홍여한(洪汝漢)은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봉직하다가 재직 중에 생을 마쳤다. 1532년 입향조 홍잠으로부터 480여 년간 범방 마을에서 세거해 왔다.
집안의 선대 내력은 다음과 같다. 신라에서는 대도독(大都督) 홍협리(洪協理), 대각간(大角干) 홍신제(洪愼濟), 삼중보국 상대부(三重輔國上大夫) 홍공우(洪貢禹) 등이 활동하였다. 고려에서는 홍은열을 시작으로 태부경(太夫卿) 홍동주(洪東周)를 비롯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홍의(洪毅), 중경대부(中敬大夫) 군기감사(軍器監事) 홍덕승(洪德升), 참지정사(參知政事)·병부 상서(兵部尙書) 홍지유(洪至柔)가 있다. 조선에서는 공조 판서(工曹判書) 홍언수(洪彦修), 대호군(大護軍) 공조 참판(工曹參判) 홍형노(洪亨老) 등 대를 이어 명관(名官) 명현(名賢)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자연 환경]
입향 당시에 녹산동 남양 홍씨 세거지(菉山洞南陽洪氏世居地)는 금병산 남쪽 남향받이 산기슭에 위치하였고, 마을 앞에는 무성한 갈대밭이 있었다. 농지로 개발된 후로는 비옥한 들판이 전국에 이름난 범방 미나리의 주산지로 각광을 받았다.
[현황]
남양 홍씨가 번창할 때는 강서구 녹산동 범방 마을, 탑동 마을, 장전 마을을 포함하여 30~40가구가 살았으나 시대의 변천과 개발로 마을이 해체되어 다른 지역으로 모두 분산되었다. 2013년 현재 새로 조성된 범방 마을[부산 경남 경마 공원의 남서쪽]에 5~6가구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