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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서동 죽산 박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92
한자 久瑞洞竹山朴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Juksan Bak Clan in Guseo-d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구서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진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구서동 죽산 박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구서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에 있었던 죽산 박씨 세거지.

[개설]

죽산 박씨(竹山朴氏)의 시조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이며,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아들인 죽성 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아들 박기오(朴寄悟)를 중시조로 한다. 고려 태조(太祖) 때 삼한 벽상 공신 태보 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太保三重大匡)에 올라 죽주백에 봉해지고 식읍으로 죽산(竹山)을 하사받은 이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명칭 유래]

구서 마을은 금정구 구서동의 본 마을로, 처음에는 구세리(仇世里)라 불렀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의 구세(仇世)는 ‘구세동거(仇世同居)’에서 따온 말로, 중국 당나라의 장공예(張公藝) 9대가 한 집안에서 살았다는 고사에서 화목한 집안을 이르는데, 이곳이 바로 그러한 지역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밀양 손씨(密陽孫氏) 족보에 의하면, 손명윤(孫明胤)의 아들 손호립(孫浩立)이 아들 9명을 두었는데, 이 아들 9명이 세거를 하면서 구세리(九世里)가 되었다고도 전한다. 1904년에 편찬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따르면 구서 마을 호수는 25호로서 죽산 박씨 7호, 신씨 1호, 동래 정씨(東萊鄭氏) 6호, 남평 문씨(南平文氏) 5호, 송씨 2호, 김씨 3호, 이씨 1호가 살고 있었다.

[형성 및 변천]

죽산 박씨는 크게 직제학공파, 문헌공파, 문정공파, 전서공파, 대사헌공파, 별장공파, 제학공파, 충현공파, 목사공파, 총제공파, 찬성공파로 나누어진다. 구서 문중은 총제공파로 총제공 박덕공(朴德公)에서 시작하였다. 박덕공은 고려가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광릉산(光陵山)에 은둔하였는데, 후일 조선 정조(正祖) 때 개성 두문동(杜門洞) 표절사(表節祠)에 모셔졌다. 박덕공의 5세손 박수(朴燧)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성주(星州)로 가게 되어, 박수의 현손 인묵재(忍黙齋) 박천추(朴天樞)는 어릴 적 성주에서 자랐다. 이후 박천추가 동래로 이거하여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박천추는 임진왜란 때 동래 향교(東萊鄕校) 교생으로 분연히 창의하여 사람들에게 충의를 일깨우고 나라에 공훈을 세워 동래 충렬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죽산 박씨 구서 문중 입향조는 24세 박천추의 손자 의재공(毅齋公) 박준(朴浚)으로, 동래 대연동에서 동래 북면 구서동으로 온 이후 세거지가 되었다. 26세 박준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28세 박상운(朴尙雲)은 아들 5명을 두었는데 박희곤(朴希坤), 박세곤(朴世坤), 박징곤(朴澄坤), 박제곤(朴濟坤), 박우곤(朴宇坤)이다. 박우곤은 두구동으로 갔다. 후손 중에는 동래 향안에 입록된 사람도 있고, 향회에도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동래 유림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자연 환경]

구서동 구서 마을동래 정씨, 죽산 박씨 집성촌으로 오랫동안 자연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며 집성촌으로서의 모습은 사라졌다. 구서동금정구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1980년대부터 신개발 지역으로 변모하였고, 인구 및 행정 수요가 급증하여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었다. 남쪽에는 종단 도로변에 도시 철도 1호선이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뒤쪽에는 금정산이 있어 경치가 좋고 공기가 맑아 주거지로 각광 받고 있다.

구서동 유적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완만하게 뻗은 높이 55m의 소구릉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75년 사찰 건물 터 공사 중 유물이 출토되어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수습 조사하였다. 구서동 유물은 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삼한 시대 와질 토기 중에서는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형태로, BC 1세기 후반에서 AD 1세기 후반까지 분포되어 있다. 유물로 와질제 주머니호, 원저호, 완(盌), 그릇 받침[器臺], 민무늬 토기 옹, 곡옥(曲玉), 환상 석기(環狀石器), 단조 쇠도끼[鍛造鐵斧] 등이 있는데, 그 당시 문화적 양상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현황]

영추재(永追齋)와 단소를 금정구 구서동에 건립하였으나, 마을 전체가 아파트 단지로 변하면서 장전초등학교 근처로 옮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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