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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동 사천 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88
한자 錦絲洞絲川-南平文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Nampyeong Mun Clan in Geumsa-dong Sacheon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 사천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영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40여 가구
세거지 금사동 사천 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 사천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에 있는 남평 문씨 세거지.

[개설]

남평 문씨(南平文氏) 시조는 삼한 벽상 공신 문다성(文多省)이다. 문다성은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지고 무성(武成)의 시호를 받았다. 이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남평으로 하였다. 남평 문씨 분파는 충혜공파(忠惠公派), 헌납공파, 순질공파, 의안공파(毅安公派), 시중공파, 성숙공파, 남제공파, 순평부원군파(順平府院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등이다.

동래 입향조는 14세 문평(文苹)이다. 1406년(태종 6) 종숙(從叔)인 가학(可學)[13세]의 모반 사건으로 가화(家禍)를 당하여 선대의 세거지인 경상남도 단성을 떠나 사천에 머물다가 1440년(세종 22) 둘째 아들 문우원(文遇元)을 데리고 동래 초읍동으로 들어왔다. 큰아들 문어동(文圉仝)은 그대로 사천에서 세거하였다.

[명칭 유래]

금사동 사천 마을 명칭은 수영강 상류인 사천(絲川)[일명 실내]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1500년대 초반 문극복이 명장 금사 부근으로 분가하여 이거하였다. 금사동 사천 마을 남평 문씨 입향조는 종손 문부복(文釜福)의 14대조 문심(文沈)이다. 문심의 고조 문평(文苹)이 조선 태종(太宗) 때 산청에서 동래로 와 명장산 기슭에 정착하여 남평 문씨 동래파를 열었다. 문심이 명장산에서 금사[사천]로 옮겨 온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었다고 하니 이 세거지의 역사는 500여 년 정도 된다. 금사동에는 남평 문씨 70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었기 때문에 문촌(文村)이라고도 하였다. 문심의 손자 문하정(文夏鼎)은 장사랑 군자감 참봉을 지냈으며, 문규조(文奎祚)와 그의 아들 문윤만(文胤脕) 등이 『동래군지(東萊郡誌)』 인물조에 기록되어 있다.

남평 문씨는 고려 문종(文宗) 때 문익을 필두로 문익점(文益漸)을 거쳐 문평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유교주의자로 일관해 왔다. 따라서 이 세거지에서도 안락서원(安樂書院) 원장 2명과 전교 4명, 동래 향교(東萊鄕校) 회원 15명을 배출하였다. 근현대에 들어 남평 문씨는 대개 불교를 숭상하였다. 사천 마을 수중산(水中山)의 보운사(寶雲寺)[1930년 창건]는 거의 이들의 시주로 운영되고 있다.

[자연 환경]

금사동 사천 마을 서쪽으로 수영강 상류인 사천이 있고 북쪽에는 수중산이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금사동 사천 마을에는 남평 문씨 40여 가구가 산다. 남평 문씨 동래금사파 문중 재실은 금성재(金成齋)다. 금성재는 1976년 준공하여 98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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