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만덕동 남원 양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59
한자 萬德洞南原梁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Namwon Yang Clan in Mandeok-d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사기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백이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1가구
세거지 만덕동 남원 양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사기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에 있는 남원 양씨 세거지.

[개설]

양씨(梁氏)는 모두 탐라국[현 제주특별자치도] 삼성혈 설화의 양을라(良乙那)를 단일 시조로 하는 동계 혈족이다. 양을라는 태고에 제주도 한라산 북록 모흥혈(毛興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탁라국(乇羅國)을 개국하여 양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374년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에 들어가자 내물왕이 성주 왕자(星主王子)의 작호를 내리고 의관을 하사하여 신라의 조복을 갖춰 입게 함으로서 이때부터 ‘양(良)’을 ‘양(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682년(신문왕 2) 양순(梁洵)이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한라군에 봉해지자 그 후손이 본관을 제주로 하였다. 757년(경덕왕 16) 양우량(梁友諒)이 왕실에 공이 많아 남원부백에 봉해지면서 제주에서 분적하여 남원(南原)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문헌의 실전으로 선계를 상고할 수 없어 양능양(梁能讓)[병부공파], 양수정(梁水精)[대방군공파], 양주운(梁朱雲)[용성공파], 양윤위(梁潤渭)[장영공파]를 1세조로 하여 각각 세계를 이어 왔다.

[명칭 유래]

만덕동은 고려 시대 절터로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만덕사지(萬德寺址)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으로 전해진다.

[형성 및 변천]

남원 양씨(南原梁氏) 족보에 따르면, 만덕동 남원 양씨 입향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양극례(梁克禮)[1615~?]이다. 남원 양씨만덕동에 자리 잡은 것은 17세기 중반으로, 만덕사가 폐사된 후 절터 주변에 자리 잡고 400여 년간 살아온 것으로 전한다.

[자연 환경]

만덕동 사기 마을은 절터를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조선 시대 동래로 넘어가던 만덕 고갯길의 시발지로서 마을 앞에 금정산성 남문 쪽에서 흘러온 만덕천이 있고, 마을 뒤로 상학산 상계봉이 배산으로 있다. 마을 서쪽을 가로막은 용을산과 만덕사지의 안산인 비룡산이 남쪽의 정면에 솟아 있어 절터로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현황]

산골 마을이었던 북구 만덕동 사기 마을은 1965년 만덕 고갯길에 차도가 개설되고 1975년 남해안 고속 도로가 마을 앞을 가로지르고 만덕 터널이 뚫리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30가구가 훨씬 넘던 남원 양씨는 차츰 줄어들었고, 마을을 지키던 노인들이 하나 둘씩 사망하면서 1990년대 초 남원 양씨는 2가구만이 남았다가 2013년 현재는 1가구만 살고 있는 실정이다. 남원 양씨 문중의 내력을 밝혀 준 양극로(梁克魯)는 「동래 지신밟기」를 재현한 선소리꾼으로서 예능 보유자로 활동하다 1990년대 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