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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광사 석가여래성도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248
한자 仙光寺釋迦如來成道記
영어의미역 The records of Attainment of Perfection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804번길 42-123[덕포동 2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재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12월 28일연표보기 - 선광사 석가여래성도기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선광사 석가여래성도기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소장처 선광사 -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 대로 804번길 42-123[덕포동 21]지도보기
성격 고도서|불경
저자 왕발(王勃)
편자 도성(道誠)
권책 1책[41장]
행자 9행 17자
규격 19.3㎝[가로]|31.8㎝[세로]
어미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
권수제 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
판심제 성도기(成道記)
권말제 협주 성도기(夾註成道記)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선광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일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

[개설]

『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는 우리나라에 을해자본(乙亥字本), 목판본 및 탁본 각 1종씩 3종류의 판본밖에 보이지 않는데, 선광사 소장본은 금속 활자로 간행된 몇 안 되는 불서류(佛書類)이다. 2011년 12월 28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사상구 덕포동 선광사에 보관되어 있다. 국내에서는 동일본이 단양 구인사(救仁寺)에 소장된 1종이 있는데, 구인사본은 2004년 10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저자]

선광사 석가여래성도기는 당나라 초기 시인 왕발(王勃)[650~676]이 지은 『석가여래성도기』에 대해 당나라 때 도성(道誠)이 주석을 한 것이다.

[편찬/간행 경위]

선광사 석가여래성도기에는 인기(印記)나 발문(跋文)이 없어서 정확한 인출(印出) 사항은 알 수 없으나, 활자와 인쇄 상태로 보아 세조 연간에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서지]

1책 41장의 을해자본이다. 크기는 가로 19.3㎝, 세로 31.8㎝이며, 반곽의 크기는 가로 14.4㎝, 세로 21.6㎝이다. 을해자는 1455년(단종 3) 진체(晋體)의 해서(楷書)로 쓴 강희안(姜希顔)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경오자(庚午字)를 녹여 만든 대자(大字)·중자(中字)·소자(小字)의 동활자(銅活字)이다. 선광사 석가여래성도기에는 중자와 소자가 사용되었다.

판본 형식은 사방을 한 선으로 둘러싼 사주 단변(四周單邊)이며, 본문에는 개별 행 사이에 계선(界線)이 있다. 행자 수는 9행 17자이며 주쌍행(註雙行)이다. 판심은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다. 권수제는 ‘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 판심제는 ‘성도기(成道記)’, 권말제는 ‘협주 성도기(夾註成道記)’라고 표기되어 있다.

황지(黃紙)의 홍사(紅絲)로 된 오침 안정법(五針眼訂法)[서책에서 철을 하는 위치인 서뇌(書腦) 부분은 베실·비단실·목실 등을 튼튼하게 꼬아 붉게 염색하여 꿰매는데, 책의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구멍을 다섯 개 뚫어 철을 하므로 오침 안정법 또는 오침 안법 등으로 부른다]으로 장정(裝幀)된 선장본(線裝本)[오른쪽 가장자리를 실로 꿰맨 서적을 말함]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송나라 최육천(崔育千)이 1034년에 지은 「주 석가여래성도기 서(註釋迦如來成道記序)」가 있고, 권수 제면(卷首題面) 두 번째 줄에는 ‘전당 월륜거 혜오 대사 사자 도성 주(錢唐月輪居慧悟大師賜紫道誠註)’라는 주석자(註釋者) 기록이 있다. 부분적으로 좀이 슬어 일부 글자를 침범하였으나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배접(褙接)하여 개장(改裝)한 상태이다.

[구성/내용]

석가모니의 일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선광사 석가여래성도기는 15세기 중엽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간행되었고, 금속 활자인 을해자로 인쇄되었다는 사실과 국내에는 동일본이 1종밖에 없는 희귀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서지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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