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5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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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治 |
영어의미역 | Politic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철현 |
[정의]
부산광역시에서 공적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와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제반 활동.
[개설]
왕조 시기 지역민 봉기나 일제 강점기 지역의 독립운동도 정치라고 할 수 있겠으나, 현대적 의미의 정치는 광복 이후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산도 광복 이후 좌우 대립의 아픔을 겪었고, 6·25 전쟁 시기에는 임시 수도 역할도 했으며 ‘4·19 혁명’의 주요 지역이기도 하였다. 5·16 쿠데타 후에는 각종 선거에서 야도(野都)로 명성을 얻었고, 부마 항쟁과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 국면에서는 선도적인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지역주의 정치에 의해 ‘일당 독점적 지배 구조’가 지속되는 가운데, 각종 선거에서 타 정당들이 고전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부산에서도 광복이나 4·19 직후, 유신이나 5공화국 하에서 진보 진영 혹은 재야 세력에 의한 운동의 정치가 있었다. 그러나 제도적 정치 과정은 정당에 의한 선거를 통해 이루어져 왔고 거기에 시민 단체 등이 영향을 미치려 노력해 왔다. 그동안 19차례의 국회 의원 선거, 11차례의 대통령 직접 선거와 5차례의 간접 선거, 그리고 4차례의 지방 의회 의원 선거 및 5차례의 동시 지방 선거 등이 치러졌다.
그 과정에서 한민당, 자유당, 민주당, 공화당, 신민당, 민정당, 민한당, 신한민주당 등 민주화 이전의 정당이나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민주자유당, 민주당,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등의 정당과 지구당들이 명멸해 갔다. 2012년 현재는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진보정의당, 통합진보당의 부산시당과 각 지역구 당원 협의회 등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민주화 이후에 등장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부산지부,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 부산환경운동연합 등의 시민 단체들이 권력 감시, 공명선거, 주민 참여 운동 등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광복과 전쟁, 독재와 저항]
광복 직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국내 정치 세력들은 좌우로 분열해 대립하였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자율적인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직접 군정을 실시했다. 부산에서도 좌익 독립운동가 노백용(盧百容)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가 조직되고 부산치안사령부가 활동을 시작했으나, 경상남도지사와 부산 부윤에 미군 장교들이 임명되는 등 군정이 실시됨으로써 유명무실화 되었다. 이후 좌익 세력은 전국노동조합 부산지방평의회 등의 조직을 결성하여 일제의 관료들을 중용하는 미군정에 대해 파업 등의 방법으로 저항했으나, 미군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서북청년회 부산지부 등 우익 세력들의 탄압을 당해내지 못하고 약화되어 갔다.
1948년 5월 10일 UN의 결의에 따라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 국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자 좌익과 중도파는 선거를 거부했고, 그 결과 부산에서도 허정(許政)[한민당, 1896년~1988년] 등 우파 4명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와해 이후인 1950년 5월 실시된 2대 총선에서는 이승만(李承晩) 반대파들이 다수 의회에 진출했는데 부산에서도 임시정부[임정] 요원으로 좌우 합작, 남북 협상에 나섰던 장건상(張建相)[옥중 당선, 1882년~1974년] 등이 당선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정부는 부산으로 천도했고 약 천일 간의 임시 수도 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에 이승만 집권을 위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국회 의원들을 강제 연행하는 정치 파동[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후 ‘사사오입(四死五入) 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길을 닦은 이승만과 자유당은 경찰과 청년단을 동원한 관권 부정 선거로 3번의 대선과 2번의 총선에서 모두 승리했으나 ‘4월 혁명’으로 무너지게 된다.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저항하여 마산을 시작으로 전개된 봉기에서 부산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대학생과 시민들로 확대되면서 4월 19일 부산역과 서면 로터리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운집하였다. 이 날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혁명 동안 부산에서 사망한 인원은 총 19명이며, 약 1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후 수립된 제2공화국에서는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 부산지구 교원노동조합 등 혁신 조직들이 결성되어 통일 운동과 노동 운동을 전개했으나 5·16 쿠데타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개발 독재와 야도(野都) 부산]
근대화와 경제 개발의 효과가 주효하여 1963년 군정이 끝나고 치러진 두 번의 대선과 총선에서 박정희(朴正熙)와 공화당은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7년 7대 총선의 경우,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위해 관권과 금권이 동원된 부정 선거가 자행되었다. 이에 대해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 지역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으며 부산에서는 7석 중 5석을 야당인 신민당이 차지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야도(野都) 부산’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1970년 8대 총선에서도 부산에서는 8석 중 6석을 신민당이 차지하였다.
장기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으로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바뀌고 총선도 1구 2인의 중선거구제로 변경되어 여야 후보들이 동반 당선되는 무의미한 선거가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유신 체제에 대한 재야의 저항이 이어지자 정권은 긴급 조치로 대응했다. 민심 이반 현상은 1978년 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1.1% 앞서는 결과로 나타났다. 부산에서는 10석 중 영도구를 제외한 전 선거구에서 신민당이 1위를 했고 공화당이 2위를 했다.
유신 반대 강경파인 김영삼(金泳三)이 김대중(金大中)의 도움으로 신민당 총재로 당선되자 공화당은 외신 기자 회견을 문제 삼아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켰다.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부산과 마산의 학생과 시민들이 격분했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이 시위가 ‘박정희 18년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부마 항쟁이었다.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釜山良書販賣利用協同組合)[김형기 주도로 1974년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설립] 등을 중심으로 역량을 길러오던 부산에서 폭발한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갔고, 결국 그에 대한 강경한 대응이 ‘10·26’을 낳으며 유신을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12·12 쿠데타’, ‘5·17 계엄 선포’ 등으로 들어선 제5공화국은 개발 독재의 연장이었으며, 이에 따라 독재에 대한 저항도 계속되었다. 특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대학과 재야 운동권의 투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각 지역 운동권을 검거하기 위한 정권의 공작도 강화되었는데, 1981년 9월 발생한 부산의 부림 사건(釜林事件)[부산의 학림 사건]은 대표적인 고문 조작에 의한 조작 사건이었다. 또한 1982년 3월 18일 고신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반미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5공화국에서도 유신 때처럼 선거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대선으로 전두환(全斗煥)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양김 세력’을 정치 규제자로 묶어버린 상태에서의 총선은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어용 야당이 적당히 의석을 분배하는 선거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영삼이 1983년 정치 해금을 요구하며 20여 일간의 단식 투쟁을 단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김영삼과 김대중 지지자들이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1985년 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부산에서도 민한당 탈당자를 포함한 9명이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당선하여, 민주정의당 3명을 재치고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1987년 정부가 ‘4·13 호헌 조치[개헌 논의 금지 조치]’를 발표하자 신민당과 재야 운동권을 망라하여 조직된 국민운동본부는 직선제 개헌 운동을 시작했고,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6·29 선언’이 나오기까지 연일 시위에 나섰으며, 부산에서도 ‘국민운동 부산본부’를 중심으로 가톨릭 센터 농성 투쟁 등이 계속되었다. 6월 항쟁에 이어 나타난 7~9월 노동자 대투쟁에서도 태광산업의 민주 노조 운동을 시작으로 조선공사, 국제상사 등의 투쟁이 이어졌다.
[민주화와 지역주의 정치 구도]
1987년 13대 대선은 양김 단일화가 실패하고 영남·호남과 충청 등 각 지역의 대표들이 경쟁하는 구도가 되어 ‘지역주의 정치’가 시작되는 선거가 되어 버렸다. 대구·경북과 호남의 지역 출신 후보에 대한 몰표가 각각 70%와 90%를 넘는 가운데, 부산에서도 김영삼 후보에게 56%의 몰표를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도 이어져 각 지역 정당들이 의석을 싹쓸이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부산에서도 민주정의당 1석을 제외한 14석 전부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차지하였다.
13대 총선의 결과로 나타난 ‘여소 야대’ 상황을 이기지 못한 민주정의당은 대권을 노리는 김영삼과 내각제를 바라는 김종필(金鍾泌)을 끌어들여 ‘삼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이 때문에 부산의 정치 지형은 한순간에 야당 도시에서 여당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기택(李基澤), 노무현(盧武鉉) 등이 삼당 합당에 반대하며 당을 지켰으나, 다음 선거에서 모두 낙선하였다.
민주자유당은 지방자치제 부활로 실시된 1991년 지방 의회 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의회 의석 51석 중 50석을 휩쓸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부산의 15개 전 선거구를 석권했고, 12월의 14대 대선에서도 부산은 김영삼에게 73.3%의 표를 몰아주었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12.5%를 받았다. 특히 선거 직전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등 고위 공직자들이 모여 관권 선거를 공모한 ‘초원 복집 사건’이 터져 김영삼 진영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역으로 영남 지역의 표를 더 결집시키는 효과를 낳았을 정도로 ‘지역주의 바람’은 거세게 이어졌다.
이후의 대선과 총선, 지방 선거에서 부산의 선택은 항상 일당 독점 구조였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과 이회창(李會昌)의 득표율은 ‘15%:53%[이인제 30%]’였으며, 16대 대선에서는 노무현과 이회창이 ‘30%:67%’였고, 17대 대선에서는 정동영(鄭東泳)과 이명박(李明博)이 ‘13%:58%[이회창 20%]’였다. 또한 1996년 15대 총선 이래, 2012년 19대 총선까지 지역구 국회 의원은 절대다수가 민자당[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이었다. 노무현 정부 하의 17대 총선에서 조경태(趙慶泰)[사하 갑]가 열린우리당으로 당선된 후 3선을 하고 있고, 19대 총선에서 대선 후보인 문재인(文在寅)[북·강서 갑]이 민주통합당 후보로 당선된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 그밖에 5회를 맞은 지방 선거 역시 부산광역시장과 지역구 부산광역시 의원은 한명의 예외 없이 모두 민자당과 그 후신인 정당이 차지했으며, 기초 단체장 역시 비슷한 상황을 보였다.
물론, 이러한 구도에 대한 변화의 희망도 있다. 2010년 부산광역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의 김정길(金正吉) 후보는 45%를 득표했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 지역의 민주당 득표율이 40%를 넘어서기도 하였다. 일당 독점에 대한 지역의 피로감도 쌓여가고 젊은 세대들의 변화 욕구도 기대를 걸어 볼 만하다. 그러나 초고령화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부산의 정치는 아직도 지역주의 일당 독점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변화의 예상이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