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5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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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2002 Busan Asian Games |
이칭/별칭 | 2002 부산 아시안 게임,2002년 제14회 부산 아시아 경기 대회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행사/행사 |
지역 | 부산광역시 연제구 월드컵대로 344[거제동 129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오륜 |
[정의]
2002년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에서 개최된 아시아 국가의 종합 경기 대회.
[연원 및 개최 경위]
1993년 4월 부산시 의회는 2002년 제14회 아시안 게임의 부산 유치를 공식 제의하였다. 시 의회 차원에서 유치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아시안 게임 부산 유치를 위한 100만 시민 서명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시는 1993년 8월 대한올림픽위원회[Korean Olympic Committee]에 부산 아시안 게임의 유치 승인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하였다. 대한올림픽위원회는 유치 승인 신청서를 검토하여 동년 9월 대한올림픽위원회 안으로 확정하고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정부는 1994년 2월 2002년 아시안 게임 부산 유치를 승인하였다.
부산아시아게임유치위원회와 부산시는 정부 승인 후 1년간에 걸친 준비 기간 끝에 1995년 2월 7일 아시아올림픽평의회[Olympic Council of Asia]에 유치 신청서를 접수하여 1995년 5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총회에서 경쟁국들을 제치고 부산이 제14회 아시안 게임 개최지로 확정되었다.
대회 조직 위원회는 아시안 게임 개최에 필요한 총 44개 경기장 중 12개 경기장은 신설하고 32개 경기장은 기존 시설을 개보수하여 활용하였다. 신설 경기장 12개 가운데 9개 경기장은 부산시가 건설하고 나머지 3개 경기장은 민간 자본을 유치하여 건설, 아시안 게임 기간 중 활용하여 재정 부담을 줄였다. 아시아드 선수촌은 대한주택공사 주관으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 반여 택지 개발 지구 내 11만 5000㎡ 부지에 아파트 16~25층, 20개동 2,290세대를 건립하였다. 이와 함께 아파트 단지 내 학교 시설 두 개와 근린 상가 등을 활용하여 1만 4000여 명의 선수 임원들이 활용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각종 편의 시설을 설치하였다.
보도 방송 시설은 2001년 5월에 준공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의 부산 전시 컨벤션 센터 내에 메인 프레스 센터와 국제 방송 센터를 각각 1만㎡씩 임차하여 활용하였으며, 아시안 게임 사상 처음으로 방송 보도 시설을 통합 운용함으로써 예산 절감과 이용자의 편의를 높였다.
[행사 내용]
44개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전체 회원국 선수 임원 9,767명과 방송 보도진 6,406명이 참가하여, 38개 경기 종목[골프, 공수도, 근대 5종, 농구, 당구, 럭비, 레슬링, 배구, 배드민턴, 보디빌딩, 복싱, 볼링, 사격, 사이클, 세팍타크로, 소프트볼, 수영, 스쿼시, 승마, 야구, 양궁, 역도, 요트, 우슈, 유도, 육상, 정구, 조정, 체조, 축구, 카누, 카바디, 탁구, 태권도, 테니스, 펜싱, 하키, 핸드볼]에 419개 세부 경기가 개최되었다. 이는 27개국, 25개 종목에 4,839명의 선수 임원이 참가한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보다 규모가 두 배 이상 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버금가는 역대 아시안 게임 사상 최대 규모였다.
2002년 아시안 게임의 공식 마스코트는 부산광역시의 시조(市鳥)인 갈매기를 디자인한 두리아이다. 두리아에는 영원한 아시아[Durative+Asia]라는 뜻의 복합어, ‘둘이[두리] 함께’라는 의미도 있다. 갈매기는 부산을 상징하는 새이기도 하다. 또한 ‘희망과 도약, 새로운 아시아[New Vision New Asia]’를 대회 이념으로 정하고, ‘아시아를 하나로 부산을 세계로[One Asia Global Busan]’를 대회 표어로 정하여 2002년 9월 29일 오후 6시에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의 개막식을 시작으로 10월 14일 오후 7시의 폐막식까지 16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인근 마산[복싱, 축구], 양산[레슬링, 스쿼시, 공수도, 축구], 울산[럭비, 탁구, 축구], 창원[핸드볼, 근대 5종[펜싱], 사격, 수영[수구], 축구]에서도 일부 경기가 개최되었다.
경기 면에서 한국 선수단은 아시안 게임 참가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애초 한국은 1986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서 개최된 제14회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38개 종목 중 카바디를 제외한 37개 종목에 1,007명[임원 238명, 선수 769명]을 출전시켜 금메달 80개 이상을 획득하여 종합 2위를 목표로 세웠다. 그런데 한국 선수단은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377개]보다 42개가 많은 419개의 금메달이 걸린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전 종목의 고른 선전으로 예상을 크게 상회하는 금메달 96개, 은메달 80개, 동메달 84개를 획득하여 중국[금메달 150개]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하였으며 일본을 금메달에서 무려 52개의 큰 차이로 제치고 아시아 스포츠 이인자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현황]
부산 아시안 게임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전 회원국의 참가, 역대 최대 경기 종목, 최대 인원 참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숱한 진기록과 화제를 뿌렸으며 월드컵 축구 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이어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분단 이후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 경기 대회에 처음으로 북한이 대규모 선수[18개 종목, 318명]를 파견하여 개회식 입장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이어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입장함으로써 아시안 게임이라는 스포츠의 장을 통하여 민족 통일에 대한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또한 북한의 만경봉호(萬景峰號)가 응원단[응원단 143명, 취주 악단 150명]을 싣고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부산항으로 입항하였다. 대회 기간 중 남한과 북한이 한마음이 되어 응원하는 모습은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의 응원단은 가는 곳마다 인기와 화제를 불러일으켜 통일 아시아드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 기간 중에 개최된 남북 체육 회담을 통해 통일 스포츠의 초석을 마련하는 등 남북 스포츠 교류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이를 계기로 남북 간 모든 분야에서 교류 협력이 더욱 활발히 추진될 것으로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