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5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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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私立華明學校 |
영어의미역 | Hwamyeong Private School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대천천길 65[화명동 20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영섭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었던 근대 학교.
[설립 목적]
우리나라의 근대적 교육은 외세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고 신식 학문이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뜻이 있는 인사(人士)들은 우리의 비참한 국운(國運)을 일찍이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은 신학문(新學問)의 수용이 늦어 세계의 진운(進運)에 어두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조국을 구하는 길은 오직 교육에 있다고 하여 이른바 ‘교육 구국(敎育求國)’ 운동을 하게 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이러한 생각이 더욱 깊어져 사립 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사립화명학교는 같은 지역 내에 1907년 사립구명학교가 설립되면서 분위기가 더욱 고무되어 설립하게 되었는데, 즉 1908년 화명동의 유지이었던 윤명의, 허주, 윤대의, 김두호, 최유수, 장진원, 윤영우, 양기택 등이 인근 수정, 대천, 공창, 동원, 화잠, 용당의 6개 마을을 위한 학교를 세우자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동년 7월 7일에 제2차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고 44명이 출석하여 기금 문제를 의논하여 7개 동에서 2,018원과 산판 12고(庫)를 마련, 기본금을 확보하였고, 교명을 사립화명학교로 결정하였다.
[변천]
1908년 7월 15일에는 동래 부윤 한치윤의 도움을 얻게 되었고 동래군 좌이면 화잠동 적석원에 교지 1,983.47㎡[600여 평]를 80원에 구입하여 교사를 건축하였다. 이런 일은 그 당시의 동세를 보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련했던 기금 중에서 교사 건축비와 기구 및 비품 구입비로 922원을 지불하고 1,086원이 남았다.
사립화명학교는 칙령 제62호 「사립학교령」에 의하여 1908년 9월 7일에 학부대신의 설립 인가를 받았다. 수업 연한은 예비과 1년, 본과 4년, 보습과 2년으로 정하고, 1908년 11월 20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는데, 입학생은 모두 50여 명이었다. 초대 교장은 윤대의, 감독은 허주, 학감은 김시주·장진원·김도후, 교감은 최유수·양기택이 선임되었다. 초대 교사는 문대홍과 김희태였다. 그러나 학교에서 임의로 정한 학교 경영진의 명칭이 적법하지 않아 1909년 2월 설립자를 윤대의, 허주, 김시주, 양기택, 윤영우, 최유수, 장진원, 김두호로 바꾸고, 이날 사임한 교사 김희태의 후임으로 동래부 수면 남수동의 이병수를 청빙하였다.
1910년 3월 30일에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고 다음해에는 7명을 배출하였다. 1911년 4월부터는 학칙에 의하여 화명학교에 보습과를 설치하고 여기에 졸업생 중에서 희망자를 수용하였다. 1913년 4월 3일에 보습과 졸업생 3명을 냈으며, 제3회 본과 졸업생도 3명을 내었다. 보습과는 1914년 7월 7일부터 자동적으로 폐지되었으며, 제5회 졸업생 5명을 사회에 진출시킨 후 1918년 4월 1일 폐교되어 사립구명학교와 합해져서 구포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화명동과 금곡동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구포공립보통학교에 통학하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많이 이용하는 등 불편이 많았다. 이에 주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1935년 10월 21일 구포공립보통학교 부설 화명간이학교의 설립이 인가되어 개교하였다. 당시의 간이 학교는 4학년까지만 있었기 때문에 5, 6학년 학생들은 다시 본교로 통학하여야 하였다. 그래서 1943년 5월 20일 정규 학교로 화명공립국민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1945년 화명국민학교, 1996년 화명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학생 교육과 학교 유지를 위한 활동이 주였다. 학생 교육은 전통적으로 민족 사상을 고취하고 항일 정신을 일깨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립화명학교의 교사였던 양봉근 등이 후일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구포 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애국 지사이었던 것에서도 이 학교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또한 1915년 화명동의 농지 확보를 위하여 백포에 제방을 쌓게 되었을 때 학교에서는 학교 직원실에서 해당 지주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학교가 제언과 수문의 부설을 부담할 것이니 각 지주들은 만 10년에 걸쳐 매년 벼 40석씩을 학교에 납부해 달라고 요청하여 쌍방 계약이 성립되고 시역하였다. 1911년 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용 도서는 『맹자(孟子)』, 『산학 통편』, 『초등 대수학』, 『고등 소학 이과』 등이었다.
[의의와 평가]
구국을 위한 지름길이 교육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실천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