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4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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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浦貯蓄 |
이칭/별칭 | 구포저축주식회사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희완 |
[정의]
개항기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었던 금융 기관.
[설립 목적]
백동화 인플레이션 해소 및 재정 개혁의 일환으로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이 실시되어 전황이 발생하였다. 자본이 부족한 상인들은 크게 피해를 입게 되었고, 부산 지역 내 일본인 은행의 지점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는 등 일본 자본가들의 영향력이 경제 전반에 드리워지게 되었다. 금융 경색이 심화됨에 따라 조선 상인들은 상업 자본을 확보할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구포저축을 설립하게 되었다.
[변천]
1909년 1월 15일 11시 구포 시장 내 은행 사무실에서 구포저축 창립총회를 개최하였으며, 1909년 2월 11일 윤상은, 장우석 등을 비롯한 김해, 양산, 초량, 수정, 부산진 등 경상남도 일대에 거주하는 67명이 합자하여 자본금 25만 원[당시 자본금 2만 5000엔, 총 주식 수 500주]으로 구포저축을 창립하였다.
국권 강탈 이후, 일제가 1911년 회사령을 공포함에 따라 구포저축은 주된 업무를 대부업에서 은행업으로 확대하자는 논의를 하였지만, 1912년 은행령 공포 이후 구포저축은 대부 업자로서 은행업을 겸영할 수 없었다. 그러자 윤상은이 기존 정관 영업 목록에 은행업을 더하여 설립을 신청하였으나, 은행령에 따라 유사 은행이 대부업과 은행업을 겸할 수 없게 제한하였기 때문에 신청이 반려되었다.
구포저축은 1911년 12월 9일 임시 주주 총회에서 자본금 50만 원, 총 주식 수 1만 주의 은행 업무를 신청하기로 합의하고, 지역 경제인들이 모집한 6천 주와 대구, 진주 등 영남 지역 내 4천 주를 모집하기로 하였다.
1912년 6월 23일 구포저축을 구포은행[자본금 50만 원, 총 주식 수 1만 주]으로 전환하고, 같은 해 9월 21일 한국 최초의 민족계 지방 은행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구포은행의 설립과 더불어 구포저축은 해산되었다. 구포저축의 자금은 구포은행으로 인계되었다. 구포은행은 자본금 50만 원, 총 주주 수 240명으로 발족하였다.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따른 호황기에 접어들어 금융 영업을 확장하고자 하여 상호를 구포은행에서 경남은행으로 개칭하고, 부산부 초량지점을 본점으로 정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구포저축은 예금을 재원으로 하여 대부업을 경영하고, 어음 할인업 등 근대의 은행업과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은행들의 주요 수입원은 어음 할인이었기 때문에 할인율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구포저축의 총이익금 구성 비율을 살펴보면 설립 이후 총이익금의 97% 이상을 대부 이자가 차지하고 있어 설립 당시의 주된 목적은 대부업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상인들의 상업 자본 조달 및 상업 활동의 기반을 제공하고자 설립되었던 구포저축은 대부 회사의 성격을 가지고 예대출 같은 은행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회사령 발포 이후 대부업 사업을 운용하는 것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구포저축을 해산하고 구포은행이 발족하게 되었다.
구포은행 설립으로 인해 참여 주주는 구포와 그 일대 보유 주식은 1,790주, 부산이 3,051주로 주요 주주들의 근거지가 구포나 양산 중심에서 부산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부산 지역[영도, 초량, 수정, 부산진 지역]에서는 기존 7명에서 신규 8명이 참여하였는데, 이 중 6명이 일본인이며 이들은 1,600주를 보유하고 있어 일본인 자본가의 영향력이 증가하였다. 참여 주주의 근거지가 변화함에 따라 구포은행의 기능 역시 구포 지역 시장에서 더 나아가 도시의 상업 이윤을 공유하는 쪽으로 변화하였고, 은행의 경영진 역시 구포 중심의 경영인에서 부산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의의와 평가]
구포저축은 한국인의 상업 자본 획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설립 주체는 지역 내 대지주와 상인, 지역 유지들로 구성되었다. 구포저축은 상인 및 지주를 상대로 대부업을 운영하였으며, 후신인 구포은행은 주로 부산 지역 무역 상인을 상대로 한 어음 할인을 주요 업무로 하여 상업 자본을 구하기 힘들었던 한국인들의 성장 기반을 제공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