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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항 매축 공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4486
한자 南港埋築工事
영어의미역 Nmahang Reclamation Construction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충무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석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매축 공사
관련인물/단체 이케다 스케타다|부산축항합자회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9년 2월연표보기 - 남항 매축 공사 착공
종결 시기/일시 1942년 5월연표보기 - 제4기 남항 매축 공사 완공
전개 시기/일시 1932년 12월 - 제1기 남항 매축 공사 준공
전개 시기/일시 1934년 11월 - 제2기 남항 매축 공사 준공
전개 시기/일시 1938년 6월 - 제3기 남항 매축 공사 준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0년 12월 - 남항 매축 기념비 제막식
발생|시작 장소 남항 매축 공사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발생|시작 장소 남항 매축 공사 -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종결 장소 남항 매축 공사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종결 장소 남항 매축 공사 -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부평동 일대에서 진행된 방파제 축조 및 해안 매축 공사.

[역사적 배경]

남항 개발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사회를 중심으로 지역 경제 발전의 관점에서 장기간 추진되어 온 숙원 사업이었다. 조선총독부 주도하에 상업항이자 군사 항으로 신속하게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던 북항[부산시 동구 초량동 일대]에 비해 어항의 기능을 가진 남항은 상대적으로 개발이 답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지역 일본인 사회는 그들이 주도하고 있던 부산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남항 매축과 관련하여 장기간 조선총독부와 교섭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사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조선총독부가 난색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상북도 문경을 거점으로 농림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가 토비시마구미[飛島組] 등 일본 자본을 끌어들여 부산축항합자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매립권을 허가받아 1929년부터 본격적인 매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경과]

1929년 2월 시작된 제1기 매축 공사는 제1 방파제 축조 및 남포동부평동 일대의 해안 매축, 그리고 매축지에 2,000톤급 선박이 접안 가능한 안벽(岸壁)[배가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게 만들어진 구조물] 축조를 중심으로 1932년 12월 준공되었다. 곧이어 제2 방파제 축조 및 초장동 해안 매축을 내용으로 하는 제2기 공사를 1934년 11월 준공하였고, 완월동 해안을 매립하는 제3기 공사가 1938년 6월 준공되었다.

이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잔여 공사를 진행하여 완공한 후 1940년 12월 매축 공사 완성을 기념하는 매축 기념비 제막식 및 공사 진행 과정에서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추모 법요를 열었다. 이로서 애초 계획한 매축 공사는 마무리 되었으나, 1941년 5월부터는 추가로 제4기 공사를 시작하여 1942년 5월 준공하였는데, 공사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결과]

1929년부터 1940년까지 11년간의 대공사를 통해 남포동, 부평동, 초장동, 완월동 해안가 48만 132.231㎡를 매축하였고, 2개의 방파제와 2,000톤급 선박 접안 능력의 안벽, 물양장(物揚場)[소형 선박을 댈 수 있는 부두] 등이 조성되었다. 총 공사비는 550만 엔이 사용되었다. 한편 이케다 스케타다남항 매축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조선 총독의 지원을 배경으로 1934년부터 적기만(赤崎灣) 매축을 시작하고, 이후 부산 임항 철도 건설, 멕시코 원유 개발 사업, 울산 공업 도시 건설 등 사업을 급속도로 확장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매축업자이자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남항은 매축 공사를 통해 국내 어항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아울러 항만 하역 시설의 확충을 통해 소형 화물선들이 드나들 수 있는 연안 무역항으로서의 능력도 갖추게 되어서 국제 무역항인 북항과의 분업도 가능하게 되었다. 자갈치 간선 도로와 남포동에서 송도로 가는 아랫길도 생겨 항만과 배후 도시의 연결도 한결 긴밀해졌다. 부산항 건설이라는 관점에서도 남항 매축을 계기로 용두산 공원과 영도 다리를 기준으로 북항과 남항이 균형을 이루는 현재 항구의 원형이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일제 강점기 부산항 개발은 군사적·경제적 대륙 침략의 거점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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