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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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第-代國會議員選擧 |
영어의미역 | 7th Busan General Election |
이칭/별칭 | 제7대 총선,1967년 총선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훈 |
[정의]
1967년 6월 8일 부산 지역에서 실시된 국회 의원 선거.
[선거 정국]
제6대 대통령 선거[1967년 5월 3일]에서 승리한 민주공화당은 그 여세를 몰아 공천 신청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는 등 본격적인 국회 의원 선거전에 돌입하였다. 반면 사분오열되었던 야권은 민중당으로 통합[1965년 5월 3일]되었다가, 다시 민중당과 신한당으로 분당되었다. 민정당계의 윤보선(尹潽善)과 민주당계의 박순천(朴順天) 간의 갈등은 한일 협정 비준 동의안과 베트남 파병 동의안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의원직 사퇴를 비롯한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던 강경파와 원내에서의 보다 온건한 투쟁을 주장하던 온건 주류계의 갈등이 마침내 윤보선을 당수로 하는 신한당의 분리·창당[1966년 3월 30일]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중당의 후보 유진오(兪鎭午)와 신한당의 후보 윤보선은 정권 교체를 위한 야당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합당하여 1967년 2월 7일 신민당이 창당되었다.
[전국 선거 결과]
제7대 국회 의원 선거는 이전과 같은 「선거법」에 의해 진행되었다[국외 부재자 투표와 같은 개정이 있었지만, 큰 틀의 변화는 없었음]. 지역구 의원 선거[131명]에 모두 702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5.36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은 131개 전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하여 양자 대결 구도를 형성하였으며, 그 외 9개 정당에서 440명의 후보자를 공천하였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이 101석을 휩쓰는 대승[전국구 27석을 포함하여 전체 의석의 73.1% 확보]을 거둔 반면, 신민당은 29석, 대중당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부터 부정 선거의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경기도 화성 선거구에서는 당선자가 민주공화당 권오석(權五錫)에서 신민당 김형일(金炯一)로 바뀌었으며, 7개 선거구의 지구당 위원장을 제명하는 등 민주공화당 스스로 부정 선거를 자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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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제7대 국회 의원 선거]
부산 지역 총 7개의 선거구에 40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평균 5.71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이 7개 전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하였으며, 자유당과 대중당이 각각 6명을 공천하는 등 모두 11개 정당이 선거에 참여하였다. 총 77만 7538명의 선거인 중에서 53만 9851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69.4%였다. 선거 결과, 신민당이 5명을 당선시켜 2명을 당선시킨 민주공화당을 압도하였다. 이러한 부산의 선거 결과는 전체 14개 의석 가운데 13개 의석을 야당이 휩쓴 서울과 함께 ‘여촌 야도(與村野都)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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