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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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池洞堰 |
영어음역 | Jidong-eo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동래 읍성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수한 |
[정의]
조선 후기 동래부 읍성 안에 있던 제언.
[명칭 유래]
지동(池洞)이란 이름은 1754년(영조 30) 동래부 읍내면 지동리라는 행정명에서 따온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지동언(池洞堰)은 조선 후기 축조된 제언 중 유일하게 읍성 안에 조성된 제언이다. 18세기 편찬된 『동래부지(東萊邑誌)』에 따르면 규모는 둘레 약 96.67m[319척], 길이 약 41.82m[138척], 폭 약 31.82m[105척], 평균 수심 약 1.21m[4척]이었다.
동래읍성은 일제 강점기 때 시가지 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벽이 철거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벽도 민가가 점유하여 마안산을 중심으로 한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겨우 남아 있다. 따라서 지동언은 1909년 수리조합 조례 발표 이후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18세기 동래부의 전경을 그린 『지승(地乘)』 「동래부 지도」와 19세기 지도인 『여지편람(輿地便覽)』 「동래부 지도」에서 지금의 동래 향교와 동문 사이에 못[池]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로는 정확한 위치는 비정할 수 없으며, 다만 동래읍성 안에 축조된 제언인 것만 알 수 있다.
[관련 기록]
1740년에 펴낸 『동래부지』 제언조에 “지동언은 동래부 동쪽 3리[약 1.18㎞]에 있다. 방죽의 길이는 138척이며 폭은 105척이다[池洞堰在府東三里長日百三十八尺廣一百五尺]”라고 기록되어 있고, 1759년에 펴낸 『동래부지』 제언조에 “지동언은 동래부 동쪽 읍성 안에 있다. 못의 둘레는 319척이며 물 깊이는 4척이다[池洞堰在府東城內周三百十九尺水深四尺]”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