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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나루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3754
한자 下端-
영어의미역 Hadan Ferry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신번영로 233[하단동 117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나루터
관련문헌 『동래부지(東萊府誌)』|『조선 철도사』|『경상도 사정(慶尙道事情)』|『통상 휘찬(通商彙纂)』
비정 지역 가락 타운 2단지 아파트 -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신번영로 233[하단동 1175]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 있던 조선 후기의 나루터.

[명칭 유래]

하단(下端)은 낙동강의 끝에 위치하여 ‘아래치’ 혹은 ‘끝치’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하단은 동래군 사천면을 상단(上端)과 하단으로 나뉘며 생긴 이름으로, 현재의 사하구 당리동·괴정동·감천동·구평동·신평동·장림동·다대동 등을 포함하는 사하 지역을 일컫던 지명이었다. 동래군 사천면 하단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라 이를 대표하는 뜻에서 불린 지명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하단은 하단동 조개더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3~4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역이다. 하단은 지형적으로 낙동강을 끼고 있어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따라서 하단을 중심으로 하는 물자 교역 등이 이루어지면서 하단 나루터가 형성되었으리라 본다. 하단 나루터에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 대동, 강서 대저와 명지·녹산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하단 나루터가 유명하게 된 것은 하단장(下端場)의 번성과 관련이 있다. 하단장은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오일장으로, 이곳에서의 물물 교류는 하단 나루터를 끼고서야 가능하였다. 특히 곡창 지대인 김해 평야의 벼 농산물이 대저 나루터에서 낙동강 하류 일대의 가장 큰 미곡 시장이었던 하단장으로 옮겨 가기 위해 하단에 집하되는 물류의 중심 포구 기능까지도 담당하였다. 또한 1876년 부산항 개항 당시 물류 중심 항으로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가 모여드는, 낙동강 물길을 이용해 내륙 지방에 운반되던 물류의 중심지였다.

특히 하단 주변의 명지(鳴旨)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김해 지방을 비롯하여 삼랑진·왜관·상주 지방에서 생산되는 벼를 교역하는 상업항이 되면서 벼를 도정하는 도정업과 쌀 소매업이 크게 번성하여 구포와 함께 낙동강 하류의 큰 장터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경부선이 구포 쪽으로 경로가 정해지면서 하단 나루터는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철도사(朝鮮鐵道史)』에 의하면, 일본이 이른바 대륙 경영을 하려면 교통이 편리해야 한다고 하여 1898년 9월 대한제국과 경부철도합동조관(京釜鐵道合同條款)을 맺는 데 성공한 후 철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관을 맺기 2년 전인 1896년 한반도에 기술진을 보내 철길을 놓기 좋은 길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네 차례에 걸쳐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린 기술진들은 삼랑진에서 낙동강 서쪽 강가를 건너 사하구 하단동괴정동을 거쳐 지금의 대티 터널 쯤에서 굴을 뚫고 서구 대신동을 거쳐 중구 동광동에 종착역을 세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하단동 주민들과 객주들이 ‘쇠말[기차]이 들어오면 동네가 망한다’고 하여 철도 부설을 맹렬히 반대함으로써 철길이 북부산(北釜山)으로 부설되었다고 한다.

1897년 8월 박기종(朴琪淙)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철도 부설을 계획하여 부산과 하단동 사이에 길이 6㎞인 철길을 부설하기 위해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하였다. 정부의 허가를 얻어 일부 착공까지 하였으나, 하단 주민들과 객주들의 맹렬한 반대 운동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 같은 원인으로 경부선 철도가 사상(沙上)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결정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하단 나루터경부선 철도 부설 뒤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열차 편을 이용한 물자 운반으로 정미업이나 교역지가 자연스럽게 하단에서 구포로 옮겨졌고, 화륜선(火輪船)과 각종 상선(商船)이 분주하게 오가던 낙동강에는 옛 동산유지(東山油指) 옆에서 명지(鳴旨)로 오가는 도선장만이 남았다. 대한제국 말까지 큰 포구로 번성하던 하단은 매년 낙동강의 홍수로 하천 바닥이 높아져 좋은 포구로서의 조건도 잃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 부산부(釜山府)가 9만 석을 수용하는 분뇨(糞尿) 탱크를 하단에 만들어 대티 고개의 투기장에 버린 분뇨가 지하구(地下溝)를 통하여 하단에 저장되었다. 이 같은 분뇨는 낙동강으로 뻗어 나간 분뇨관을 통하여 배출되어 분뇨선(糞尿船)에 실려 김해 평야로 나가기도 하고, 낙동강에 버려지기도 하였다.

1932년에 구포 다리가 놓이면서 물류 집하장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어 명지와 을숙도를 오가는 낚시꾼이나 유람객을 위한 초라한 나룻배 도선장으로 전락하고, 1971년 4월 15일 대티 터널이 뚫리며 도선장마저 쇄락해졌다. 1987년 낙동강 하구둑 매립 공사로 하단 나루터의 기능이 사라지고 주변은 대부분 매립되었다. 현재 사하구 하단동 가락 타운 2단지 아파트 놀이터에 세워진 하단포비에서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현재 사하구 하단동 가락 타운 2단지 아파트 부근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하단 나루터에 관한 기록은 『동래부지(東萊府誌)』, 『조선 철도사』 1[조선총독부 철도국, 1937], 『경상도 사정(慶尙道事情)』 1[1904], 『통상 휘찬(通商彙纂)』[1894~1913] 등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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