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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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影島大橋 |
영어의미역 | Yeongdo Grand Bridge |
이칭/별칭 | 부산대교,영도 다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지명/도로와 교량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영도구 대교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석만 |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한 다리.
[개설]
영도대교 건설 이전 영도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나룻배였다. 처음 정기적으로 운행한 것은 1890년 용미산(현 롯데백화점 광복점)의 남쪽 기슭과 영도의 봉래동 갯가이고, 1893년 자갈치시장과 영도 대평동 갯가 사이를 운행하였다.
영도대교는 옛 부산시청 남쪽에서 영도의 북서단을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연륙교(連陸橋)이자 유일한 일엽식(一葉式) 도개교(跳開橋)였다. 영도대교의 준공으로 영도는 부산항의 보조항이자, 공업 지대로서 부도심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영도대교는 일제의 학정과 6.25 전쟁의 비극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와 함께하며 말없이 지켜본 또 다른 애환을 심어 주었던 다리로 기억되기도 한다.
[명칭 유래]
본래는 부산대교로 부산에서 가장 큰 다리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었다. 지역민들은 영도와 연결된다고 하여 영도 다리로도 불렀다. 1982년 2월에 새롭게 부산대교가 준공되면서 기존의 부산대교는 영도대교로 개칭되었다.
[제원]
영도대교의 길이는 214.63m, 폭은 18m이며, 교량 면적은 3,948㎡, 도개 면적은 1,044㎡이다. 중앙 동쪽의 31.3m를 도개교로 하여 1,000톤급 기선의 운항이 가능하도록 건설되었다. 도개 속도는 저속일 때 4분, 고속일 때 1분 30초, 도개 동력은 22마력이었다. 다리의 영도 쪽 부분은 한쪽 끝이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캔틸레버(cantilever)식 강판항교(鋼板桁橋)로 하였다. 다리 아래로는 만조 시에도 50톤급 이하의 기선이 교량 밑을 자유로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총 공사비는 당시 700만 8000엔이 투입되었다. 2013년 11월 27일 복원 개통한 영도대교는 길이 214.7m, 너비 25.3m의 왕복 6차선이며, 도개교의 길이 31.3m, 무게 590톤으로, 2분여 만에 75° 각도로 세워진다.
[건립 경위]
부청(府廳)의 도시 계획과 항만 개발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다. 밤에는 나룻배가 운행할 수 없어 영도 왕래가 불편했던 현실적인 문제도 작용하였다.
[변천]
일제 강점기 부산항 개발과 배후 항만 도시 건설의 관점에서 중구와 영도를 연결하기 위해서 1932년 4월 20일 착공, 1934년 11월 23일 준공되었다. 준공 당시에는 부산대교로 명칭이 확정되었으며, 시민들은 영도 다리로 불렀다. 1935년 2월에는 전차가 개통되어 다리 위를 지나다녔다. 1966년 9월 1일에 다리의 도개가 중단되며 고정식으로 바뀌었고, 1967년 5월 2일 전차 운행이 폐지되었다. 1982년에는 개항 100주년을 맞아 착공한 부산대교가 나란히 준공되면서 영도대교로 개칭되었다. 2003년 안전 진단 검사에서 위험 등급을 받아 철거 논란을 겪었으며, 2006년 11월 25일에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2007년 7월 6일 확장 복원공사 및 임시교량 건설을 착공하였고, 2009년 7월 27일 임시교량이 준공, 8월 영도다리 상판 철거공사를 시작, 2011년 2월 26일∼3월 13일(16일)까지 도개구간 마지막 모습을 공개행사를 거쳐 4월 상판이 완전 철거되었다. 2013년 6월 2일 상판 첫 가설공사가 시작, 7월 26일 복원 도개교를 처음 시험 가동하여 11월 27일 왕복 6차로 확장 복원 준공 개통하였다.
[현황]
영도대교는 2013년 11월 27일 도개교로 복원 개통하여 매일 한 차례씩 낮 12시에 영도대교 도개 장면을 볼 수 있다. 2015년 9월 도개시간이 낮 2시로 변경되었다. 영도대교는 시대에 따라 그 이름도 다양하게 불리었다. 건설 당시 영도쪽 접속도로와 호안매립공사 때 주위의 산이 무너져 많은 노무자의 사망으로 유령이 나타난다하여 「유령다리」로 불렸고, 다리가 개통된 뒤 도개하는 광경이 신기하다고 하여 「마법의 다리」라고 불렸다. 6·25 전쟁 때에는 피난민들이 만남의 장소인 「만남의 다리」로 불렸고 생활고를 비관하여 운명을 달리한 곳이기도 하다. 새롭게 단장하여 도개 기능이 복원 개통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추억속의 다리」, 「희망의 다리」로 부산의 새로운 문화콘텐츠의 아이콘으로 태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