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2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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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藝 |
영어의미역 | Calligraphy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명환 |
[정의]
부산 현대 서예의 역사.
[개설]
전통적으로 한국 서예사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신라 시대 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 조선 시대 안평 대군(安平大君)·한호(韓濩)[한석봉(韓石峯)], 조선 말기의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이야기할 수 있다. 비문(碑文)으로는 고구려 시대 광개토 대왕비, 평양 각석, 울진 봉평 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백제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등이 있다.
[광복 후]
광복 후 부산 서예에 어떤 서예가가 활동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부산은 지리적으로 항구 도시이자 국제적인 관문인 관계로 다른 도시보다 유림(儒林)의 활동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6·25 전쟁은 전국의 서예가들이 부산에 집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부산에 안착하여 부산 서예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 당시 전업 서예가라기보다 직업을 가지고 취미로 서예를 하였다. 하지만 많은 후학을 길러 내어 현재 부산에서 전업 서예가로 1,000여 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취미로 서예를 하고 있는 숫자가 3만 명에 이르고 있다.
광복 후 대표적인 서예가로 운여(雲如) 김광업(金廣業)[1906~1976]과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1908~1991]을 들 수 있다. 김광업은 평양에서 출생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을 졸업하여 안과 의원을 경영하였으며, 1955년에는 부산 최초의 서예 학원인 동명서화원(東明書畵院)을 개설하였다.
김광업은 명망 있는 의사였지만 평생 서예와 전각에 전념하였다. 호인 ‘운여’ 그대로 ‘구름처럼’ 살다 간 김광업은 맑고 시원한 선필(禪筆)을 남겼다. 예술을 팔아 밥을 먹지 않고, 이름을 위해 일가를 이루지 않았으니 글씨에서 도(道)를 일군 자유인이라 할 만하였다. 또한 김광업의 붓놀림은 골기(骨氣)와 부드러움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경지를 보여 준다.
오제봉은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1923년 출가하여 의곡사 등지에서 37년간 승려 생활을 하는 한편 글씨를 익혀 명필이 되었다. 김광업과 함께 동명서화원을 운영하였으며 경남고등학교와 경남상업고등학교에서 서예 강의도 하였다. 1965년에는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추천 작가, 1970년에는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초대 작가, 심사 위원이 되었다. 1968년부터 현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에서 청남묵연회라는 이름으로 후학을 지도하였다.
오제봉은 1960년부터 1970년대까지 전성기의 활동상을 보였으며, 그 동안 남긴 서예의 자취를 찾아보면 용두산 공원 표석, 촉석루 현판, 양산 통도사 현판, 덕수궁의 가락당 현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제봉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먹을 갈았다. 서예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 『청남고도관(菁南古道觀)』을 출간하고 10폭짜리 병풍 1만 점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들 서예인들은 제1회 경남 미술전[주최-민주신보사, 날짜-1958년 11월 16~23일, 장소-동광초등학교 강당]에 참여하여 광복 이후 활동하게 된 서양화 등과 함께 부산 미술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때 서예부의 심사 위원으로는 김광업이 활동하였다. 이후 부산 화단에서 30년 이상 활동해 온 1950년대, 1960년대 중진 화가들이 그들의 발표와 제작 의욕을 돋우고 젊은 작가들에게도 자극제가 되기 위해 결성된 모임인 5·6동인을 결성하였는데, 여기에 서예가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2회에 걸친 전시회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그렇게 많지 않았던 서예가들이 나름의 활동으로 부산 미술의 일원으로서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몇몇 대표적인 서예가들을 찾을 수 있다. 석불(石佛) 정기호(鄭基浩)[1899~1989, 대한민국 국새 1호 제작자], 향파(向破) 이주홍(李周洪)[1906~1987, 아동 문학가], 먼 구름 한형석(韓亨錫)[1910~1996, 독립운동가 및 음악인],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1917~2012, 전각가], 도인(島人) 이만우(李晩雨)[1907~1991, 4·5대 국회 의원], 난곡(蘭谷) 박시표(朴蓍杓)[1910~1979], 우당(于堂) 한국원(韓國爰)[1911~2005], 동계(東溪) 박명찬(朴明讚)[1914~1998], 묵해(黙海) 김용옥(金容玉)[1915~1998], 청아(淸莪) 신용옥(辛容玉) 등이 부산 근대 서예가들로 분류된다.
[1970년대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와 부산 미술 대전]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부산에서도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시대가 열렸다. 청남 오제봉이 일찍이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초대 작가로 활동을 하고 그 뒤를 이어 우석(于石) 김봉근(金鳳根), 고천(古泉) 배재식(裵在植), 소정 서정환, 창남(蒼南) 고동주(高銅柱), 우현 민성수 등이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여 좋은 성과를 이루었다.
우석 김봉근은 중국 청나라 말기 서예가인 조지겸(趙持謙), 오양지(吳讓之) 등의 전서(篆書)[전서는 넓은 뜻으로는 예서 이전에 있는 서체로 갑골문·금문·석고문·육국고문·소전·무전·첩전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좁은 뜻으로는 대전과 소전이 주축이 된다.]를 선보였는데 전서의 단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표현하여 전서 서예 작품의 격을 한층 더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전각(篆刻)[글씨를 쓰고 난 뒤 낙관하는 데 쓰이는 도장] 작품도 많이 하였는데 전국의 전각가들과 많은 교류도 있었다.
고천 배재식은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대통령상[1975년]을 수상하였다. 배재식의 작품은 황정견(黃庭堅)[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닌 중국 송나라의 시인 겸 화가이다. 황정견의 서체는 해서에 가까운 행서체이면서 전반적으로 길고 힘이 있고 멋스러움이 담겨 있다.]을 근간으로 근골(根骨)을 더욱 발전시켰다.
1970년대는 광복 이후 명칭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던 부산 미술 대전이 본격적으로 선보인 시기이다. 부산 미술 대전에 동양화, 서양화, 회화, 공예, 사진 등과 함께 서예가 참여하게 되었다. 이 시기 167회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서예는 17차례를 차지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서 많이 유행한 서풍은 해서로는 중국 당나라 시대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서풍이었는데 단정하고 화려한 정자에 가까운 서풍이 유행하였다. 한편 전서는 우석 김봉근의 영향으로 중국 오양지, 서삼경(徐三康), 조지겸 등의 서체가, 행서로 왕휘지(王徽之) 서풍과 황산곡(黃山谷) 서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1980년대~1990년대 부산 서예 중흥기]
1980년 7월 30일 전두환(全斗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대학 졸업 정원제와 과외 전면 금지를 뼈대로 한 7·30 교육 개혁 조치를 단행함에 따라 과외가 전면 금지되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에서도 서예 학원들이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하였다. 공부하는 학생 수도 기하 급수학적으로 증가하여 20여 개의 학원이 300여 개로 늘어났다. 당시 태권도 학원, 서예 학원, 피아노 학원 등 많은 예체능 학원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부산 서예계에서는 부산 서예의 내실을 다지고 더 나아가 부산 서예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먼저 조직을 만들었다. 이 시기 전국에서는 서예가들이 크게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1980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반대하는 서예가를 주축으로 한국서도협회[현 한국서도예술협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서도예술협회에서 주관하는 전국 서도 민전이라는 대회가 2013년 33회로 지속되고 있다.
한편 서울에서도 1981년 30회를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시대는 막을 내렸고 1982년 대한민국 미술 대전으로 민전 시대의 막이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미술 대전의 입상은 어려워졌고 여러 가지 잡음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1989년 한국서예협회, 1992년 한국서가협회가 창립되면서 한국 서단은 세 개 단체로 분리되었다.
중앙의 서예가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부산에서도 여러 개의 단체가 연이어 창립되었다. 대표적으로 1993년에 부산에서도 한국서예협회 부산지회, 한국서가협회 부산경남지회가 창립되었다. 이들 단체가 서로 화합하면서 부산 서예계는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부산의 원로 서예가인 청남 오제봉이 사제를 내어 1989년 청남문화라는 법인을 만들어 전국 휘호 대회를 매년 개최하였다.
둘째, 1980년대 한국 서단의 거목들이 부산에서 서예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꽃들 이미경[1983년], 여초 김응현[1988년] 등의 강연을 통해 부산 서예인들은 작품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또 작품을 더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들 유명 서예가에게 개인적인 사사를 받는 것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이미경의 강연과 작품에 영향을 받아 한글 서예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미경은 한글 서예가이며 궁체 전문가로서, 이미경의 꽃들체는 서예 폰트로 제공되고 있다.
1980년대 부산의 서풍은 중국의 개방으로 전서로는 금문(金文)[쇠로 만든 판이나 돌로 만든 비석 따위에 새겨진 중국 고대 글자], 갑골문(胛骨文)이 선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예서로는 한대(漢代)의 한노상한칙조공묘예기비(漢魯相韓勅造孔廟禮器碑)[예기비로 부름], 사신비(史晨碑), 한노상을영청치공묘백석졸사비[약칭 을영비] 등의 서체가 많이 발표되었다.
해서로 대표적이던 구양순, 안진경으로부터 중국 북위 해서체가 유행하였다. 북위 해서체는 중국에서 해서의 법이 아직 완전하게 정형화되지 않아 그 모양과 필법은 서예가의 임의대로 마음껏 발휘하여, 어떠한 제약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북위대의 해서체는 거칠고 강하고 기형적인 해서체가 창출되었다. 행서 작품은 왕휘지 서풍이 유행하였으나 기존의 단정하지만 일종의 억양(抑揚)을 지녔던 황산곡 서풍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1990년대 후반부터 서풍(書風)의 다양화와 여러 그룹의 발표전이 이어졌다. 젊은이가 주축이 된 부산 청년 서예인전, 부산 여성 서예인의 부산여성서예인협회전, 가톡릭서예인협회전, 부산서연회전, 삼인전, 고윤 서회전, 상문회전 등이 있다.
부산 미술 대전[부산미술협회 주관]이 2013년 현재까지 39회가 열리면서 서예 부문 초대 작가가 200여 명이 배출되어 전업 작가와 후학 지도 활동을 하고 있다. 2005년 부산 서예 비엔날레가 창립되어 국제적인 행사가 격년에 걸쳐 부산에서 열리며, 전 세계 서예인의 작품을 부산 시민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에 부산 서풍은 중국과 일본, 대만 등 많은 국제 교류전의 행사로 어떠한 서풍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서예의 현대화 작업으로 미술과 접목도 시도되고 있다. 전서는 금문, 갑골문 등이 유행하고 있다. 해서는 북위 해서가 주류를 이루고, 예서는 한나라 예서[예기비, 사신비, 을영비 등]에 한나라 목간에 쓰이는 목간체(木簡體)[중국 한나라 때 많이 써 한간체(漢簡體)라고도 불리는 목간체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대나무 등에 글자를 써넣으면 먹이 아래로 흘러내렸던 것에 착안해 글을 흘려 보이게 하는 것으로 호쾌하면서도 고전미를 더해 준다.]를 접목한 창작의 예서가 유행하고 있다. 행서는 왕휘지풍이 여전히 유행하고 있다.
한글 서예는 궁체(宮體)[조선 시대 궁녀들 사이에서 쓰였던 한글 서체로, 유려함, 곡선적 율동감, 균형감이 넘쳐 한자 서예와 대비되는 여성 서예로서 일반 부녀층 사이에서 유행해 내서(內書)라고도 하였다.]에서 더욱 발전하여 민체(民體)[조선 시대 한글 사용의 확대와 더불어 서민들이 서신을 교환하거나 구어체로 말하던 서간, 가사, 한글 소설의 발전을 토대로 그 소설을 베껴 쓰는[書寫]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태동한 소박하고 인간적인 멋을 풍기는 서체]를 접목한 현대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