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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교 보덕초량교회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802
한자 扶桑敎寶德草梁敎會所
영어의미역 Bodeok Choryang Church of Busanggyo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고관로7번길 28-1[초량동 14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 시설
설립자 강기십랑(岡崎十郞)
설립 시기/일시 1931년 6월 29일연표보기 - 부상교 보덕포교소로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35년 10월 26일 - 포교소 폐지계 제출
개칭 시기/일시 1932년 12월 5일연표보기 - 부상교 보덕포교소에서 부상교 보덕초량교회소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7월 2일 - 강기십랑(岡崎十郞)을 포교 담임자로 선정
최초 설립지 부상교 보덕포교소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143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었던 부상교 소속 교당.

[설립 목적]

일본 바쿠후[幕府] 말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습합 신도, 즉 ‘신종교(新宗敎)’는 봉건 체제 붕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근대화 프로젝트의 부작용 등을 파고들어 신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음으로써 단기간에 발전을 이루었다. 부상교(扶桑敎)[후쇼교] 역시 그 중 하나로, 1873년 시시노 나카바(宍野半)에 의해 후지 신앙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1882년 일본 정부 포고령에 따라 국가 신도(國家神道)에서 분리된 13개 교파 신도(敎派神道) 중 하나가 되었으며, 조선 개항 이후 일본의 타 신종교와 함께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식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에 진출하여 그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변천]

부상교 보덕초량교회소는 1931년 6월 29일 부산부 초량정 143번지[현재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부상교 보덕포교소(扶桑敎寶德布敎所)’라는 이름으로 설립 인가되었으며, 그 포교 담임자로 같은 해 7월 2일 강기십랑(岡崎十郞)이 선정되었다. 1932년 12월 5일 ‘부상교 보덕초량교회소(扶桑敎寶德草梁敎會所)’로 개칭되었으며, 1935년 10월 26일 포교소 폐지계를 제출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종교 의례와 포교가 그 주된 활동이었다. 부산부의 조사에 따르면 1932·1933년의 신도 호수는 일본인 68호였으며 1934년에는 일본인 130호였다. 이를 통해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황]

과거 부상교 보덕초량교회소가 위치했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143번지 일대는 현재 오케이 예식장 등으로 변모하여 일제 강점기 당시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의의와 평가]

메이지기 이래 부상교 등 일본의 신종교는 천황제 근대 국가를 지지했으며, 본국을 넘어 식민지에서까지 통합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현황 파악을 통해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의 일제의 문화적 침투의 양상을 알 수 있어, 향토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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