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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교 초량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740
한자 金光敎草梁敎會
영어의미역 Busan Choryang Curch of Geumganggyo
이칭/별칭 금광교 부산교회 초량포교소,금광교 초량포교소,금광교 초량소교회소
분야 종교/신종교,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 시설
설립 시기/일시 1923년 6월연표보기 - 금광교 부산교회 초량포교소로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 이후연표보기 - 해체
이전 시기/일시 1933년 2월 22일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637-2에서 638-2로 이전
이전 시기/일시 1937년 5월 3일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638-2에서 수정동 1030-5로 이전
개칭 시기/일시 1931년 2월 2일연표보기 - 금광교 부산교회 초량포교소에서 금광교 초량소교회소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1년 5월 28일연표보기 - 금광교 초량소교회소에서 금광교 초량교회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3월 17일 - 마에다 마츠[前田マツ]에서 전전진태랑(前田眞太郞)으로 포교 담임자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2년 11월 28일 - 포교 담임자를 산하창춘(山下昌春)으로 변경
최초 설립지 금광교 부산교회 초량포교소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구 부산부 초량정 637-2]
주소 변경 이력 금광교 초량소교회소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구 부산부 초량정 638-2]
주소 변경 이력 금광교 초량교회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부산부 수정정 1030-5]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동구에 있었던 금광교 소속 교당.

[설립 목적]

일본 바쿠후[幕府] 말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습합 신도, 즉 ‘신종교(新宗敎)’는 봉건 체제 붕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근대화 프로젝트의 부작용 등을 파고들어 신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음으로써 단기간에 발전을 이루었다. 금광교(金光敎)[곤코교] 역시 그 중 하나로, 교조 아카자와 분지[赤澤文治]는 민간에서 악신으로 알려져 있는 금신(金神)에 대한 공포감을 없애고 자비심이 깊은 천지금내신(天地金乃神)[텐치카네노카미]으로 바꾸어 민중을 구제하려고 하였다. 천지금내신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믿어졌으며, 금광교에서는 그 신에게 빌면 현실적인 인간의 기원이나 원망을 실현시켜 준다고 가르쳤다. 1882년 일본 정부 포고령에 따라 국가 신도(國家神道)에서 분리된 13개 교파 신도(敎派神道) 중 하나가 되었으며, 조선 개항 이후 일본의 타 신종교와 함께 식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에 진출하여 그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변천]

금광교 초량소교회소는 금광교 부산교회 초량포교소(金光敎釜山敎會草梁布敎所)[금광교 초량포교소]라는 이름으로 1923년 6월 부산부 초량정 637-2번지[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설립되었다. 1931년 2월 2일 금광교 초량소교회소(金光敎草梁小敎會所)로 개칭하고 3월 17일에 포교 담임자를 마에다 마츠[前田マツ]에서 전전진태랑(前田眞太郞)으로 변경했으며, 1932년 11월 28일에는 포교 담임자를 다시 산하창춘(山下昌春)으로 변경하였다. 1933년 2월 22일 초량정 638-2번지로 이전했고, 1937년 5월 3일에는 수정정 1030-5번지[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로 다시 이전하였다. 1941년 5월 28일 금광교 초량교회(金光敎草梁敎會)로 개칭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종교 의례와 포교가 그 주된 활동이었다. 부산부의 신도 수 또는 신도 호수 조사에 따르면 1930년 신도 호수 일본인 80호, 1931년 신도 호수 일본인 311호, 1932년·1933년 신도 호수 일본인 315호와 조선인 1호, 1934년 신도 호수 일본인 335호와 조선인 2호였다. 그리고 1936년의 신도 수는 일본인 330명이었다.

이를 통해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초량동수정동 지역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집주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가 극히 소수에 그쳤다는 것은 조선인에 대한 금광교의 교세 확장에 명백한 한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현황]

금광교를 포함한 일본의 신종교는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여, 그 명맥이 끊어졌다.

[의의와 평가]

메이지기 이래 금광교 등 일본의 신종교는 천황제 근대 국가를 지지하였으며, 본국을 넘어 식민지에서까지 통합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현황 파악을 통해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의 일제의 문화적 침투의 양상을 알 수 있어, 향토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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