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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교 부산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738
한자 金光敎釜山敎會
영어의미역 Busan Curch of Geumganggyo
이칭/별칭 금광교 부산교회소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2가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 시설
설립자 전전오조(前田吾助)
설립 시기/일시 1903년 3월연표보기 -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 이후연표보기 - 해체
이전 시기/일시 1911년 12월 27일 - 토성동
이전 시기/일시 1911년 12월~ 1930년 12월 - 토성동
개칭 시기/일시 1941년 5월 28일연표보기 - 금광교 부산교회소에서 금광교 부산교회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0년 12월 25일 - 전전오조(前田吾助)에서 전전진태랑(前田眞太郞)으로 포교 담임자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2년 9월 18일 - 전전진태랑(前田眞太郞)에서 산하경영(山下鏡影)으로 포교 담임자 변경
최초 설립지 금광교 부산교회소 -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구 부산부 부평정]
주소 변경 이력 금광교 부산교회소 -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2가[구 부산부 토성정 2정목 27-1]
주소 변경 이력 금광교 부산교회소 -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2가[구 부산부 토성정 2정목 19]

[정의]

개항기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에 있었던 금광교 소속 교당.

[설립 목적]

일본 바쿠후[幕府] 말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습합 신도, 즉 ‘신종교(新宗敎)’는 봉건 체제 붕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근대화 프로젝트의 부작용 등을 파고들어 신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음으로써 단기간에 발전을 이루었다. 금광교(金光敎)[곤코교] 역시 그 중 하나로, 교조 아카자와 분지[赤澤文治]는 민간에서 악신으로 알려져 있는 금신(金神)에 대한 공포감을 없애고 자비심이 깊은 천지금내신(天地金乃神)[텐치카네노카미]으로 바꾸어 민중을 구제하려고 하였다. 천지금내신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믿어졌으며, 금광교에서는 그 신에게 빌면 현실적인 인간의 기원이나 원망을 실현시켜 준다고 가르쳤다. 1882년 일본 정부 포고령에 따라 국가 신도(國家神道)에서 분리된 13개 교파 신도(敎派神道) 중 하나가 되었으며, 조선 개항 이후 일본의 타 신종교와 함께 식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에 진출하여 그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변천]

1903년 3월 전전오조(前田吾助)가 관리장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같은 해 5월 15일 부산 주재 일본 영사의 동의를 얻어 부평정[현재의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에 금광교 부산교회소(金光敎釜山敎會所)를 설치하였다. 이후 전전오조는 직접 교회장이 되어 1911년 12월 27일 교회소를 토성정 2정목 27-1번지[현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로 신축 이전하는 등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1930년 12월 25일 포교 담임자가 전전진태랑(前田眞太郞)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때 주소가 토성정 2정목 19번지로 되어 있어, 1911년 12월부터 1930년 12월 이전의 어느 시점에 소재지가 변경된 것으로 추측된다. 1941년 5월 28일 금광교 부산교회(金光敎釜山敎會)로 개칭되었으며, 1942년 9월 18일에는 포교 담임자가 산하경영(山下鏡影)으로 다시 바뀌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종교 의례와 포교가 그 주된 활동이었으며 매월 3일, 10일, 22일에 월차제[月次祭]를 지냈다. 부산부의 신도 수 또는 신도 호수 조사에 따르면 1916년의 경우 교도 수 100명에 신도 수 1,500명, 소속 부인 회원 수 150명이었다. 또한 1921~1927년의 신도 수 또는 신도 호수 현황을 보면 1921년 신도 수 일본인 1,650명, 1922년 신도 수 일본인 1,670명과 조선인 15명, 1923년 신도 호수 일본인 418호, 1924년 신도 호수 일본인 525호와 조선인 10호, 1927년 신도 호수 일본인 560호와 조선인 10호였다.

그리고 1929~1934년의 현황은 1928년 신도 호수 일본인 453호와 조선인 6호, 1929년 신도 호수 일본인 550호와 조선인 6호, 1930년 신도 호수 일본인 540호와 조선인 3호, 1931년 신도 호수 일본인 1,609호와 조선인 4호, 1932년·1933년 신도 호수 일본인 1,620호와 조선인 4호, 1934년 신도 호수 일본인 1,695호와 조선인 3호였다. 1936년은 신도 수가 일본인 1,657명과 조선인 28명이었다. 이를 통해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동이 이루어졌지만, 소수의 조선인 신도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금광교를 포함한 일본의 신종교는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여 그 명맥이 끊어졌다.

[의의와 평가]

메이지기 이래 금광교 등 일본의 신종교는 천황제 근대 국가를 지지했으며, 본국을 넘어 식민지에서까지 통합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현황 파악을 통해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의 일제의 문화적 침투의 양상을 알 수 있어 향토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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