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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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會 |
영어의미역 | Churches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규 1 |
[정의]
부산 지역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집단 혹은 예배 공간.
[개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회의 사전적 의미는 “성령에 의하여 결합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기원전 4년경 출생한 예수가 33년간 이 땅에 살면서 가르치고 행한 복음에 근거하여 예루살렘에서 처음 설립되었다. 그 후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소아시아·북아프리카·유럽·아시아로 전파되었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선교 활동에 의해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대두되면서 세계 곳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변천]
한국의 경우, 1876년 개항 이전에도 기독교와 간헐적인 접촉이 있었으나, 개항 이후 서구 선교사들의 내한과 함께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 최초의 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설립된 솔래[松川]교회이다. 이후 1885년 인천내리교회, 1887년 새문안교회·정동감리교회가 설립되는 등 한국 각지에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부산에서는 개항기에 들어서면서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가 설립되었다. 설립 시기는 초량교회가 1892년, 부산진교회가 1901년으로 되어 있으나, 최근 부산진교회가 1892년에 세워졌다는 설이 대두되어 부산 최초의 교회를 두고 논란 중이다.
이들 교회의 설립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부산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초량교회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파송한 월리엄 베어드(William Baird) 목사에 의하여 1892년 11월에 설립되었다. 월리엄 베어드 목사는 1890년 12월에 미국을 출발하여 1891년 1월 29일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며칠 뒤인 2월 3일 서울에서 열린 미국 장로회 선교부가 한국에 파견한 선교사회의 공식적인 부산지부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 해 9월에 부산에 부임하였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부산에 지부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마땅한 부지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다가 1891년 9월에 선교 부지[중구 중앙동 코모도 호텔이 있는 곳]를 구입하고 그 달 24일부터 선교관을 겸한 주택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4월 15일에 미처 공사가 끝나지도 않은 채 입주하여 본격적으로 선교 사역에 착수하였다. 베어드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교인으로서 권서인으로 활동하던 서상륜과 함께 남해안 등지를 여행하면서 한국인의 사랑방 문화를 체험하고, 이를 선교 전략에 활용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는 시작한 것이 초량교회[당시 영선현교회]의 최초의 예배가 되었다.
1892년에는 호주 선교사에 의해 부산진교회가 설립되었다. 1890년 데이비스의 사망으로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890년 호주의 빅토리아에서 장로교부인연합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이 본격적으로 한국 선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맥케이(Mackay) 목사 부부와 맨지스(Manzies), 포세트(Fawcett) 등 3명의 독신 여성 선교사가 부산에 도착했고, 이듬해 8월에는 여 선교사 무어(Moore)도 가세했다. 그러나 선교의 어려움으로 모두 사망하거나 떠나고 맨지스만 남게 되었다. 맨지스는 강습회, 의술 활동 등을 통해 부산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이것이 일신여학교와 부산진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 교회를 뒤이어서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고, 동래군 기장 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동래군 지역의 교회로는 1902년 안평교회가 처음이다. 안평교회는 처음 박신연, 정덕생, 정희조, 정덕선, 박도주 등을 신자로 하여 설립되었다. 1905년에는 동래읍교회[현 수안교회], 기장동부교회[왕길지, 정덕생 참여], 항서교회[사보담, 김성우 등 참여]가, 1906년에는 구포교회[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심익순과 김문익이 참여]가 설립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동래군 지역에 본격적으로 교회가 만들어졌다. 1907년 장전리교회[왕길지, 정덕생 참여], 금사리교회[왕길지, 정덕생 참여], 송정교회[왕길지, 정덕생 참여], 1911년 구서교회[맨지스에게 전도되어 신도 3~4명이 참여], 산성교회[왕길지], 두구동교회[정덕생, 정현의 참여], 내덕리교회[최영수 참여], 월전교회[최상림, 임재형 참여], 하단리교회[왕길지 참여], 1915년 영도 동삼동의 동삼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이상의 장로교 이외에 1921년에는 미국 감리교 소속 신자이던 길보른[Kilbolune] 목사의 전도로 수정동에 성결교회가 생겼는데, 이것이 부산 지역 성결교회의 효시이다.
이렇듯 1910년대에 폭발적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부산 지역 교회는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부산진교회와 자매 학교였던 일신여학교가 주동적 역할을 했으며, 좌천동 봉기의 주축이 되었다. 일신여학교 교사였던 박시연, 주경애가 부산진교회의 주일 학교 교사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산진교회와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다.
1931년 당시 부산 지역 교회의 교인 수를 보면 부산진교회 364명, 영선정교회 138명, 항서교회 250명, 성결교회 75명, 동삼교회 38명, 부산성결교회 127명, 구세군 25명을 비롯하여 일본인 교회로서 일본 메소지스트교회[대청동] 291명, 부산일본기독교회[보수동] 323명, 부산성공회[대청동] 7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진교회, 초량교회, 영주동교회, 항서교회, 부산교회, 동래읍교회의 여섯 교회를 합하여 교인 수는 1,000여 명 내외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산진교회에 뿌리를 둔 부전교회가 1932년에 설립되었다.
1938년 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결의한 후 1940년과 1941년에 전쟁 준비를 완료한 일본은 한국 교회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다. 1942년에는 ‘교단’ 명의로 통합시켰는데, 1943년 5월 5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성결교회, 안식교회 및 침례교회[동아기독교]가 해산 당하고 모든 교파를 ‘일본기독교단’에 예속시켜 ‘통리’라는 직명을 두고 일본인들의 노선대로 이끌어갔다. 경남노회도 같은 해에 해산되었고 재건에 2년 6개월이 걸렸다. 해체된 경남노회는 채필근 목사가 교단 통리로 되고 경남교구장 김길창 목사가 제1회 경남교구회를 항서교회에서 1944년 5월에 개최하였다.
광복 후 영남 지역에서는 경남노회의 재건 작업에 착수하였다. 1945년 9월 2일 부산시 교회연합회에서 뜻있는 교역자들이 신앙부흥운동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교회 재건과 노회 복구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제47회 경남노회가 부산진교회에서 개최되었고, 신사 참배 거부 후 출옥한 주남선 목사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첫째 수도원을 건설하여 일제의 탄압 하에 신앙 양심을 더럽힌 교직자들을 수양시켜 새로운 출발을 가지게 할 것, 둘째 신사 참배 거부로 폐쇄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하고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참된 교역자를 양성할 것, 셋째 대전도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도자를 대량 양성할 것 등의 교회 재건 방안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이상의 것이 지켜지지 않자 9월 18일에 또 모임을 가지고 그 실천 방안으로, 첫째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옮겨 일단 교회를 사직할 것, 둘째 자숙 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하여 시무 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숙안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제47회 경남노회에서는 전 재건노회 임원의 총 사직을 요구하고 출옥한 성도인 주남선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또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았던 현 교직자들의 철저한 자숙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자숙을 거부하고 여전히 교권 장악에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1946년 12월 3일 진주 봉래동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 제48회 정기 노회에서 일제 강점기 때 경남교구장을 지내고 신사 참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노회는 신사 참배는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가결하였고 더 나아가 앞서 설립된 고려신학교의 인정을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도 취소할 것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의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것이 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진해 경화동교회를 시발로 초량교회, 문창교회, 부산진교회, 거창읍교회, 영도교회, 남해읍교회 등 6개 교회가 부패한 경남노회를 바로 잡기 위하여 투쟁하기로 하고 1947년 1월 3일자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결과 김길창 목사 이하 전 임원이 사퇴하였다. 결국 한국 교회의 영적 갱신 운동과 재건 운동은 갈등과 분리를 거듭한 결과 대한예수장로회와 정통 교단인 고려파 교단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1950년의 6·25 전쟁은 큰 민족적 시련이기도 했지만 때를 같이하여 분열을 거듭하는 한국 교회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1952년소위 법통노회 중심의 고려신학교 계파가 분립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였고, 1953년에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으로 인한 신학 논쟁이 발단되어 한국신학대학 계열의 교회들이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에 앞서 장로교에서는 소위 재건파와 복구파가 분립되었다.
이런 시기에 부산 지역 교회는 전쟁 기간 동안 구호 활동도 전개하였다. 예를 들어 부산진교회는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 때 위문금 2만 5,000환을 보냈다. 1960년대 한국 기독교 내에는 보수적인 흐름과 진보적인 흐름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회가 창설되고 정리되었다. 이와 함께 1970년대에는 적극적으로 전교 활동을 하여 많은 교회가 창설되었다.
[현황]
2014년 현재 부산 지역 교회 수는 1,800여 개 정도이다. 주요 교단별로는 개혁 52개, 개혁정통 11개, 개혁총연 1개, 개혁총회 5개, 개혁회 4개, 고려개혁 1개, 고신 298개, 고신개혁 4개, 구세군 9개, 그리스도의 교회 5개, 기감 59개, 기성 74개, 기장 16개, 기침 102개, 기하성 75개, 나사렛 2개, 대신 14개, 독립교단 58개, 루터 2개, 백석 4개, 복음교회 4개, 브니엘 70개, 성공회 7개, 성서침례 11개, 세계종합 8개, 예성 4개, 예장장신 12개, 오순절 1개, 정교회 1개, 재건 19개, 총공회 11개, 통합 256개, 피어선 5개, 한영총회 9개, 합동 494개, 합동개혁 15개, 합동보수 4개, 합동연합 5개, 합동중앙 11개, 합신 34개, 합총 1개, 호헌 2개, 무소속 1개[이상 가나다 순] 등이다.
지역별로는 강서구 56개, 금정구 197개, 기장군 89개, 남구 139개, 동구 57개, 동래구 139개, 부산진구 156개, 북구 159개, 사상구 110개, 사하구 173개, 서구 62개, 수영구 80개, 연제구 97개, 영도구 55개, 중구 30개, 해운대구 223개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