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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키네마주식회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559
한자 朝鮮-株式會社
영어공식명칭 Chosun Kinema Corporation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1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병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영화 제작사
설립자 나데 오또이치
설립 시기/일시 1924년 7월 11일연표보기 -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해체
최초 설립지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1가 중구청 아래쪽[부산부 본정 5정목 19]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의 영화 제작업체.

[개설]

1899년 영화가 소개 된 후 부산에서는 1903년 행좌와 송정좌라는 극장이 운영되었다. 이어서 1907년 부산좌, 1914년 욱관보래관, 1916년 상생관[해방 후 시민관]이 각각 생겨났다. 부산 지역의 영화 산업은 1916년 미국 영화 「명금」과 같은 화제작을 비롯하여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무성 영화 등이 상영되면서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3년 윤백남(尹白南)이 처음으로 조선에서의 극영화 시대를 열었다. 총독부 체신청의 지원을 받아 「월하의 맹세」를 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조선 극장 대표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춘향전」으로, 1924년 단성사 사주 박승필(朴承弼)도 「장화홍련전」으로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흥행 성공의 사례가 알려지자 영화사 설립의 붐이라고 할 만큼 영화 제작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이 같은 영화 제작 열기 속에서 생겨난 조선 최초 주식회사 체제의 영화 제작사였다. 그러나 회사 설립 과정은 재부 일본인과 우리 영화인의 불안한 결합체라는 민감한 취약점을 안고 출범하였다. 경영진 또한 일본 상공인을 중심으로 의사, 변호사, 승려 등 각계 종사자를 주축으로 투자자가 형성되어 영화 관계자가 전무하였던 점은 제작사로서는 조직적이지 못한 불합리함을 잉태하고 있었다.

특히 기술진과 출연진[배우]의 인적 구성 또한 그러했다. 기술진은 전원 일본에서 초청된 자들로 채워졌으며 출연 배우는 우리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목적이 우선이었으므로 당시 부산의 국제관 무대에서 공연 중인 무대예술연구회 멤버들인 연극인을 전원 입사시키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거기에 시대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이후여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발생할 갈등 문제가 내재된 가운데 구성되어 출범 자체가 순탄치 않았음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허가된 목적 사항에서도 당국은 순수한 영화 제작 회사로서의 활동을 보장하기보다 식민지 통치를 위한 내선융화에 초점을 맞추고, 문화 통치라는 일본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설립 목적]

회사 설립 목적은 내선융화(內鮮融和) 및 각종 교육 자료가 될 만한 영화 제작 판매, 조선에 있어서 각 방면의 실사 영화 제작 판매, 조선 풍속을 기본으로 하는 순(純) 영화 제작 판매, 일반의 수요에 응하는 활동사진 촬영, 활동사진 상설관의 경영 및 순회 상영, 영화 상설관 경영 및 영화 제작 사업에 대한 투자, 내외 영화 및 촬영 영사기 등의 매매와 대부 등이었다.

[변천]

1924년 7월 11일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나데 오또이치를 대표로 본점은 부산부 본정 5정목 19[현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1가 중구청사 아래]에 두고, 복병산 일대의 옛 러시아영사관 2층 건물을 사옥 겸 촬영소로 사용하였다. 일본인 자본과 기술, 한국인 배우가 합세하고, 3,500원짜리 프랑스제 발보 카메라를 구입하는 등 기본 설비를 갖추어 이 회사가 조직화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구조는 필름 저장실, 감독실, 배우들의 기숙사까지 갖추어 제작 회사로서의 면모를 겸비했다. 자본금 7만 5000원, 불입금 1만 8750원을 출자하여 7월 11일 설립된 영화 제작사였지만 설립 1년 만에 해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대 제작된 조선 영화는 「해의 비곡」[1924], 「아리랑」[1926]을 포함하여 총 61편으로 연 평균 6편에 불과하여 배급 균형에 문제가 있었으나, 부산의 경우 상설 영화관인 행관, 보래관, 상생관의 일본인 경영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홀대받으며 상영되지 못하였다. 부산에서 상영된 조선 영화래야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창립작 1924년 가을의 「해의 비곡」이 처음[극장명, 일자 미상]이었으며 유일했다.

「해의 비곡」은 멜로 드라마였다. 제작비 800원을 들여 제작된 이 작품은 주로 부산과 제주도, 대구 등지에서의 로케이션 촬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주연에는 부산에 본사를 둔 경남은행 출납계 직원이자 ‘전부산군 야구팀’의 투수로 명성을 떨치던 이주경(李周璟)이 전격 발탁되었다. 작품에 대한 국내 반응은 신통찮았으며, 일본으로 수출되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통속적이고 반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첫 작품이 국내 흥행에 실패하자 한국인 감독 윤백남이 두 번째 작품을 맡게 되었다. 이주경, 김우연, 안중화 등이 주역을 맡은 궁중 사극물 「운영전(雲英傳)」[또는 「총희의 연(寵姬의 戀)」, 1925]은 세종의 넷째 아들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총애를 받던 운영이 문재에 뛰어난 김 진사와 사랑하여 같이 도피까지 벌이나, 결국은 동반 자살하고 만다는 줄거리의 영화이다. 영화적 완성도나 흥행 면에서 실패하고 마는데, 특기할만한 것은 나운규(羅雲奎)가 이 작품에서 단역 가마꾼으로 데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후에도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세 번째 작품 「암광(暗光)」[1925]과 네 번째 작품 「촌의 영웅」[1925]을 제작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1년 만에 단명하였음에도 한국 영화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최초로 주식회사 제도를 도입하여 네 작품이나 완성한 선진성은 물론이고 나운규, 안종화(安鍾和), 이경손(李慶孫) 등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영화인들이 이 회사를 거치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점 등은 당시 부산 영화 산업의 선진성과 역사성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지금의 영화 도시 부산을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영화 초창기 시절 부산의 이러한 문화적 자선이 일제 강점기에 이미 남포동 극장가라는 밀집된 근대적 문화 공간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6·25 전쟁 후 서울에서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대규모 영화 축제를 ‘부일 영화상’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일보에서 주관하게 했다. 오늘날 세계적 영화 축제로 성장한 부산 국제 영화제도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공간’을 중심으로 생겨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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