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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503
한자 國際館
영어의미역 International Hall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지명/시설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용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극장
개관|개장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개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9년 2월 27일 - 화재로 소실
최초 설립지 국제관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정의]

1920년대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에 있던 영화관.

[개설]

1920년대에 부산에는 부산좌(釜山座)[현 중구 부평동], 보래관(寶來館)[현 중구 창선동], 행관(幸館)[현 중구 광복동], 상생관(相生館)[현 중구 동광동], 국제관(國際館)[현 중구 중앙동], 태평관(太平館)[현 중구 창선동], 수좌(壽座)[현 영도구 남항동], 유락관(遊樂館)[현 동구 좌천동] 등 8개 극장이 있었다. 1924년 통계에 의하면 1457일간 33만 7228명이 영화를 관람하여 당시 8만 부산 인구가 연평균 4회씩 관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상설관인 보래관, 상생관, 행관의 입장 관객은 24만 7813명으로 전체 입장객의 70%를 차지하였으며, 나머지 30%는 국제관, 태평관, 수좌, 유락관이 점유하였다.

영화관 입장료는 1921년에 1등석이 60전, 2등석이 40전, 어린이가 20전이었으며, 1925년에 1등석이 80전, 2등석이 60전으로 인상되었으나 1926년에 종전 요금대로 환원되었다. 최고 입장료는 1925년 3월 4일에 일본 영화 「수병의 어머니」가 1원을 받았다. 당시 서울 입장료가 어른이 1원 50전, 학생이 1원이었던 것과 비교하여 상당한 편차를 보였다.

[건립 경위]

국제관은 1920년 8월에 부산역 앞[현 중앙동]에 개관하였다. 1910년에 부산 지역 극장은 난립 현상을 보여 욱관(旭館)을 비롯하여 5개관이 짧은 기간에 사라지고 이후에 부산좌, 보래관, 상생관 그리고 행관이 흥행을 독점하는 형태가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가 되자 국제관이 개관하게 되었다.

[변천]

국제관은 개관 이후 1920년대에 세워진 유락관, 태평관, 수좌 등과 함께 당시 각광을 받던 공연장이었다. 21년간 영화 상설관으로 운영되었으며, 태평관과 함께 연기 공연장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활동사진[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일본의 연쇄극[키노 드라마]을 비롯한 영화 상영도 빈번해졌다. 1924년에는 조선키네마의 전속 배우가 되는 무대예술연구회 동인들이 무대에 올랐던 극장으로 1929년까지 지속되었다. 1929년 2월 27일에 국제관이 화재로 소실되어 자취를 감춘 이후에는 보래관, 상생관, 행관이 안정적인 배급지로 선의의 경쟁을 주도, 호황기를 누렸다. 국제관은 1929년에 소실된 이후, 운영되지 않았다.

[구성]

영화 상설관으로 출발했던 국제관은 가부끼, 연쇄극 등 무대 공연도 하였다. 1922년 4월 15일에는 『매일 신보』 독자를 위한 영화 상영회 개최로 「애의 극(愛의 極)」, 「평화 박람회의 실황」이, 12월 27일에는 부산청년회 주체 유럽 대모험 영화가 국제관에서 상영되었다. 1923년 5월 17일에는 러시아 빈민 구제 영화 상영이 있었고, 1925년 7월 16일에는 「신의 장」이 상영되었다. 1927년 6월 3일에는 단성사 지방 순업부가 조선키네마 경영 대회를 국제관에서 개최하였으며, 「과인의 정체」 등 5편을 상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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