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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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玉從孫-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a Filial Son Ok Jongs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양리 |
[정의]
조선 시대 부산 지역 출신의 효자 옥종손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
[개설]
효자 옥종손을 노래한 고전 문학은 부산 지역의 동래 부사로 부임한 문인들이 부친을 위하여 단지(斷指)[손가락을 자름]하였다는 옥종손(玉從孫)의 효심에 감흥하여 지은 한시이다.
[유래]
효자 옥종손은 동래현의 아전인 옥석근(玉石根)의 아들이다. 11살 때 아버지가 문둥병에 걸렸는데, 이에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 드려 병을 낫게 했다. 1483년(성종 14) 2월 경상도 관찰사 김자정(金自貞)이 계를 올려 이 일을 알리자 조정에서는 벼슬과 상을 내렸다. 옥종손에 관한 일화는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 동래현, 기장현 조에 실려 있으며, 조선 후기의 문인 권별(權鼈)이 지은 문헌 설화집 『해동잡록(海東雜錄)』에도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또, 조선 후기의 문인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조선 시대 중인 이하 인물의 삶을 소개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도 옥종손에 대한 일화가 등장한다.
[옥종손을 노래한 한시]
1. 윤훤(尹喧)[1573~1627]의 시
일지비관불약인(一指非關不若人)[손가락 하나쯤은 관계치 않았으니 보통 사람과 같지 않네]
백신령욕속오친(百身寧欲贖吾親)[백번 죽을지언정 차라리 내 어버이와 바꾸고자 함이었네.]
천생석류우난처(天生錫類尤難處)[하늘이 선함을 내려줌이 어려운 곳에서 더욱 그러하니]
향리아동우해빈(鄕吏兒童又海濱)[향리의 아이와 또 바닷가 마을이네]
1605년 동래 부사로 부임한 윤훤은 옥종손의 일화에서 그가 손가락을 잘랐다는 대목에 주목을 했다. 그래서 “손가락 하나쯤은 관계치 않았으니”라는 구절을 통해 그 효성이 일반 사람보다 뛰어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옥종손의 신분이 궁벽한 고을의 아전의 아들임을 떠올리며 바닷가 마을의 향리 아이가 하늘이 내린 선한 성품을 지녔음에 감탄하고 있다.
2. 이춘원(李春元)[1571~1634]의 시
수성어천아역인(受性於天我亦人)[하늘에서 사람 성품을 받았으니 나 역시 사람이라]
천애무일불사친(天涯無日不思親)[하늘 끝에서 어버이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구나]
이래편감종손효(邇來偏感綜孫孝)[요사이 더욱 종손의 효도에 감동하니]
작설의연고수빈(綽楔依然古水濱)[작설(綽楔)은 옛 물가에 변함없구나]
이춘원은 옥종손의 효행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1607년 동래 부사로 부임을 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지게 된 이춘원은 “하늘 끝에서 어버이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며 그러한 자신의 상황 때문에 더욱 옥종손의 효도에 감동을 한다. 여기서 작설은 나라에서 효행을 행한 사람의 집 앞에 세워 주는 정려문을 의미하는데, 이는 당시 옥종손의 정려문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효자와 열녀를 포창(褒彰)[찬양하여 내세움]하여 그 덕을 기렸다. 옥종손은 부산 지역의 유명한 효자로 두 명의 동래 부사가 남긴 시를 통해서라도 당시 옥종손의 효성이 얼마나 널리 알려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