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7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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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鮮大學設立期成會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 3가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병욱 |
[정의]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 3가에 있었던 사립 남선대학 설립 관련 기성회.
[설립 목적]
개항 이후 신식 교육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매우 강렬하였으며, 이는 일제 강점기 동안의 식민지 차별 교육을 통해 더욱 절실해졌다. 당시 조선인에게 초등 교육 외 고등 교육의 기회는 제한적이었고, 그나마도 실업 교육에 치중된 것이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고등 교육에 대한 부산 시민의 요구는 뜨거울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시민 스스로의 힘에 의한 대학 설립 추진 운동으로 나타났다. 남선대학설립기성회(南鮮大學設立期成會) 역시 이러한 움직임 중 하나인데, 기독교 계통의 대학을 구상하였다.
[변천]
해방 직후 남선대학설립기성회는 미군정에 대학 설립원을 제출하였고, 1945년 10월 10일 학무 감독관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대학 개설을 위해서는 사학 운영을 위한 법인의 설립이 선행되어야 했으므로 이에 따른 절차적 문제도 있었고, 당시 부산에서는 민립대학설립기성회도 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어 한 지역에 2개 대학이 동시에 개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도 높았으며, 무엇보다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성회의 활동은 그리 순탄치 못하였다.
10월 중순경 경상남도 내무부 학무과장 윤인구는 부산 시내 대학 설립 단체를 통합하여 도립 대학 설립을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에 12월 하순 각 대학설립기성회의 간부들이 모여 도 당국의 통합론에 찬동하였으나, 1946년 초 남선대학설립기성회 측은 이를 ‘관료적 독선’이라고 비판하며 통합론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 대학 설립 운동을 추진하기로 태도를 바꾸었다.
남선대학설립기성회의 중심인물은 당시 남선재단[현 남성재단] 이사장이던 김길창(金吉昌) 목사였고, 미 군정청 경상남도 고문 정기원(鄭基元) 박사가 이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대신동 구 입정상업학교(立正商業學校)의 교사를 가교사로 하고 정기원을 총장으로 추대하여, 1946년 2월 1일부터 학생을 모집하는 광고를 냈다. 이때 교명도 남선대학에서 남조선대학(南朝鮮大學)으로 개명하였다. 당시 남조선대학은 신학부, 정경학부, 법문학부로 구성된 대학 학부와 문학예과로 구성되었으며, 1학년 정원은 500명이었다.
그러나 개교를 앞둔 2월 중순 경상남도 학무과는 미 군정청의 인가가 없었음을 근거로 남조선대학의 개교를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군정청 고등 교육 감독관 역시 재정·교수진·시설 문제 등 대학 설립을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며 이후 다시 정식 인가를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대학은 정식 인가 없이 4월 2일 임시 교명 ‘남조선법문학원’으로 개교하였고, 결국 모집 학생들이 국립 부산대학교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김길창 등 기성회 측 간부 5명이 사퇴하고 하원준을 이사장으로 하는 30여 명의 이사회가 새로 조직되었다. 새 이사회는 더 이상 대학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정재환(鄭在煥)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대학설립기성회에 모든 것을 이관하였고, 그 결과 1946년 11월 1일 동아대학이 개교하였다. 이후 동아대학은 1947년 12월 30일 문교부로부터 재단 법인인 동아학숙(東亞學塾)의 설립 인가와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현황]
남선대학설립기성회에 의해 설립된 남조선대학과 남조선법문학원의 후신인 동아대학은 이후 1959년 종합 대학인 동아대학교로 승격하여 부산 지역 주요 사립 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의 하단 캠퍼스, 서구 동대신동 3가의 구덕 캠퍼스, 서구 부민동 2가의 부민 캠퍼스 등 3개 캠퍼스를 보유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선대학설립기성회의 활동은 해방 직후 부산 시민의 고등 교육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비록 직접적인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동아대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져 부산 지역사와 교육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