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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정사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684
한자 鷲井寺-
영어의미역 Site of Chijeongsa Temple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상곡길 71[용천리 203-2] 상곡 마을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조원영최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절터
소유자 부산광역시청
관리자 부산광역시 기장군청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5년 8월~1998년 2월연표보기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및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소재지 취정사 터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 203-2 상곡마을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부산대학교 박물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 2동 산 30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터.

[개설]

취정사(鷲井寺)는 신라 시대 원효 대사(元曉大師)가 세웠다고 하며, 장안사(長安寺)·안적사(安寂寺)·선여사(船餘寺)와 더불어 기장 지역의 4대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18세기 중기에 제작한 『해동 지도(海東地圖)』 「기장현 지도」와 『비변사인 방안 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영남 지도」의 기장현(機張縣), 18세기 말기에 제작한 『여지도(輿地圖)』와 『광여도(廣輿圖)』의 기장현에는 동면(東面)의 취봉산(鷲峯山·鷲封山)[현 달음산]에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 ‘경상도 기장 산수’에는 “취봉산이 기장현의 북쪽 20리[약 7.85㎞]에 있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취정사[축정사]는 기장현에서 북쪽으로 약 8㎞나 떨어진 취봉산의 정산인 취봉[일명 수리봉] 아래에 18세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특히 취정사는 불광산(佛光山)장안사에 못지않게 큰 규모로 존속하였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변천]

읍지에서는 취정사가 취봉산에 있었는데 이제는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기장 지역에 있던 4대 사찰 중에서 장안사보다도 서열이 높았다고 한다. 원효 대사가 절을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전하는데, 이곳에 절을 세운 원효 대사는 바로 앞에 보이는 청룡등이 너무 낮아서 장안사보다 이곳이 번창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 내용은 마치 현재의 상황을 원효 대사가 예언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취정사가 폐사되고 난 후에 회자되던 창건 설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설화를 포함하여 창건 설화가 전하는 기장 지역의 사찰들은 모두 원효 대사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당시 인근의 범어사나 통도사 같은 사찰은 의상(義湘)이나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유독 기장에 남아 있던 4대 사찰은 하나같이 원효 대사의 창건으로 전하고 있다.

취정사 터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 상곡 마을에 있는 취정천의 시원이 되는 원효사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옛 절터라고만 알고 있으며, 취정사라는 사찰 명칭은 모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폐사된 터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효사 부근에 있는 밭에서는 옛 기와 조각과 석상(石像)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런 단서가 없다. 또한, 취정사 터 일대에 대한 지표 조사 결과 주춧돌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고 전하는 석불의 조각 한 점 발견할 수가 없었다. 현재 조계종의 비구니 사찰인 원효사의 시주 할머니 얘기에 따르면, 50여 년 전 이곳에 원효대라는 대처승의 사찰이 있었고 40여 년 전 그 옆에 원효사를 조성하였으며, 이 원효사 바로 위편 석축으로 쌓아 올린 평탄한 대지에 입상과 좌상의 석불이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입상은 오래전에 반출되었고 6~7구의 좌상이 파손된 채 남아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후 모두 누군가에 의해 반출되었다고 한다.

[위치]

취정사 터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 상곡 마을에 있는 원효사 부근으로, 취봉산의 취봉 아래에 위치하였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5년 8월부터 1998년 2월까지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부산대학교 박물관이 지표 조사를 하여 절터임을 확인하였고, 기와 조각 등을 수습하였다.

[현황]

50여 년 전에는 취정사의 위치로 짐작되는 원효사 뒤쪽의 평지에 입상과 좌상의 석불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표 조사를 할 때는 초석이나 석불의 파편 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취정사를 세웠다고 전하는 원효 대사는 기록을 살펴보면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 대사와 달리 그의 법맥을 잇고 있는 제자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원효 대사의 정토 신앙은 신라 불교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왕경(王京)인 경주에 한정되지 않고 각 지역으로 파급되었을 것이다.

원효 대사 사후에도 원효 대사의 사상과 불교 대중화 활동을 존경한 승려들이 통일 신라 이후 고려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 의해 원효 사상은 지방 사회까지 두루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기장 지역에도 원효 대사의 학풍을 존경하였던 승려 집단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다. 바로 이들에 의해 기장의 사찰들이 모두 원효 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전승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취정사를 비롯한 기장 지역의 사찰들은 이후에도 폐사될 때까지 원효 대사의 사상적 경향을 면면히 이어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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