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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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錫鳳 |
영어음역 | Choe Seokbong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청년 운동과 해방 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한 우파 정치인.
[가계]
아버지는 한의사 최군천(崔君天)이고, 독자로 태어났다. 여동생으로 최복순(崔福順)이 있다. 최복순은 1930년 1월 제2차 학생 만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기독교여자청년회장을 지냈다.
[활동 사항]
1. 일제 강점기
최석봉(崔錫鳳)은 1901년 부산부 초량동 612번지[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부산에서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운 뒤 1918년 귀국하였다. 최석봉은 부산에 음악 연구 기관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 초량의 청년들과 함께 1921년 3월 9일 동서음악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최석봉은 윤찬이(尹贊伊)와 함께 간사를 맡았고, 회장에는 김규(金珪), 총무에는 이근용(李瑾鎔)이 선출되었다. 1921년 12월 부산 청년 회관에서 부산 지역 유지 30여 명이 전기 문제에 대해 협의할 때 이에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교섭 및 실행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최석봉은 1922년 부산청년회에 입회하였고, 4월 22일 부산청년회 총회에서 연예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2년 8월 17일 부산청년회 연예부 주최로 국제관에서 소인 연극을 개최하였다. 1923년 11월 부산청년회 제7회 정기 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5년 8월 일제의 문화 정책을 지원하던 부산 초량동 소재 보천교 포교소를 습격·파괴하여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6년 7월 4일 출옥하여 가업인 광제호(廣濟號)를 이어받았다.
이후 최석봉은 부산의 조선인 상공업계 유력 인사들과 함께 자본금 1만 원을 모아 환공 운송점을 매수하여 1931년 1월 공립운송합자회사를 설립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 부산청년회가 해산된 뒤부터는 상인으로 행세하였다.
2. 해방 후
1945년 10월 1일 결성된 신문화건설회의 연예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가 인민 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지지하는 것에 반발하여, 1945년 10월 5일 개최된 건국준비위원회 경남 연합 대회에서 재정 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신탁통치반대 경남도위원회 재정부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신탁반대국민총동원 부산시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독립촉성협의회 경남도지부 재정 부장과 독촉국민회 중앙 경남 지방 위원 및 독촉국민회 부산지부 제1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7년 5월 독촉국민회 간부인 배은희에 대한 테러 사건 관련으로 부산경찰서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기도 하였다.
1947년 7월에는 한국독립당 부산시지부장을 역임하였고, 8월 국민의회에서 파견한 경남북 위원으로 선출되어 지방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7년 9월 국민의회 법무 위원과 법무 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2월에는 국민의회가 한국 민족 대표자 대회와 합동하기로 하였을 때 국민의회 측 3명의 대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남북 연석회의 파견원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