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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706
한자 李瑾容
영어음역 Yi Geunyong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로13번길 85[초량동 50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서용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사|부산시장
성별
본관 전주(全州)
대표경력 부산시장
출생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 이근용 외과병원 개원
활동 시기/일시 1952년 1월 - 부산아동자선병원 개원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대한결핵협회 경남지부 창설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부산 시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74년 - 서울로 이주
몰년 시기/일시 1976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500
학교|수학지 휘문의숙 -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952-1
학교|수학지 경성의학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교토제국대학 - 일본 교토
활동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성산로 250]
활동지 이근용 외과병원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500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아동자선병원 -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1가10지도보기
활동지 부산 시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7가 20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의사이자 행정가.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189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서 아버지 이재영(李載榮)과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이근용선조의 후손인 능원 대군의 10세손으로, 할아버지 이종응(李宗應)은 철종과 가까운 친족이고, 아버지 이재영은 왕실의 의전 실장이었다. 이근용의 동생 이성용은 한국인 최초로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내과 전문의로, 의친왕의 시의(侍醫)를 지냈다. 4·19 혁명 직후 과도 정부에서 내각 수반을 지낸 허정(許政)과는 사돈지간이다.

[활동 사항]

이근용(李瑾容)은 사학 명문인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을 다녔고, 졸업 후에는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5년 홍씨와 결혼하여 1년 뒤 아들 이해량(李海良)이 태어났으나, 아내는 출산 후유증으로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충격 속에 새로운 출발을 위해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3년간 외과를 전공하였다.

귀국 후 이근용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외과 부장이 되었고, 부속 병원의 간호사와 재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부산으로 내려와 영주동에 병원을 개원하였다. 환자 진료에 열성적이었던 이근용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아예 돈을 받지 않을 각오로 진료를 하여, 부산에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이근용은 1945년 8월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 가옥을 싸게 불하받아, 동구 초량동에 대지 1,652.89㎡[500평]에 이르는 큰 규모의 이근용 외과병원을 개원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근용은 양유찬, 한정교 박사 등과 함께 전쟁고아를 위한 자선 병원 설립에 앞장서서, 1952년 1월 서구 아미동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구내에 부산아동자선병원을 개원하고, 이사장이 되어 가난한 아이들을 전액 무료로 진료하였다. 그런데 아끼던 동생 이성용이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이근용은 결핵 퇴치 운동에도 앞장섰다.

대한결핵협회가 생기자마자 정일천, 이찬세 박사 등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들과 힘을 합쳐 1957년 5월 대한결핵협회 경남지부를 창설하였다. 이후 4년간 부산지부장을 맡아 검진 기계의 현대화를 꾀했고 부산 시내에 10곳의 결핵 전문 개인 병원들에 무료 상담소를 설치하였으며, 대한의학협회 의장, 경상남도 의사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자 이근용이 부산시장으로 내정되었다. 이근용이 거절하자 허정은 행정 경험이 없는 이근용을 위해 노련한 김해 군수를 부시장으로 임명하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1960년 5월 부산시장으로 취임하였다. 이근용은 그 해 11월 민주당 정부에 의해서 지방 자치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부산시장에 취임한 지 7개월 만에 직선으로 선출된 후임 시장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1960년 12월 16일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이근용은 이후 병원과 교회 일에 열정을 쏟았고, 친목 단체로 부산로터리클럽도 조직하였다. 또한 말년에는 문예에도 관심을 가져 부산시조창 회장을 맡기도 한다. 80세가 되면서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노쇠해지자 아들의 권유로 부산에서 자리를 잡은 지 50여 년 만인 1974년, 제2의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로 돌아갔다. 이근용의 아들 이해량은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과 여당 국회 의원을 지낸 한국 연극계의 거목이다. 이근용은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76년 여름 82세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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