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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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佛敎靑年會 |
영어공식명칭 | Chosun Buddhist Youth Acssociation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연주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에서 활동했었던 불교 청년 항일 운동 단체.
[개설]
조선불교청년회는 일제의 사찰령 등과 같은 모순된 사찰 정책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 혁신 운동을 전개한 불교 청년 항일 운동 단체로 1920년 6월 20일 서울 각황사에서 창립되었다. 부산 지역의 범어사를 비롯하여 전국 주요 사찰에 지회(支會)를 두고 정교 분립(政敎分立)을 주창하면서 사찰령 철폐 운동 등 불교 혁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3·1 운동 직후 정치와 종교는 개별화시켜야 한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정교 분립을 주창하는 사찰령 철폐 운동의 전개를 통해 일제의 사찰 정책을 극복하고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는 불교 혁신 활동을 주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조선불교청년회는 범어사, 통도사, 대원사 등의 청년 대표들의 1909년 봄 불교청년회의 발기를 거쳐, 1911년 6월 15일 쌍계사에서 영호남 청년 대표 59명이 모여 발회식을 거행한 ‘조선불교청년회’가 효시였다. 이는 박한영(朴漢永)·한용운(韓龍雲) 등이 주도한 임제종 운동의 중심 사찰이 범어사 등의 영호남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불교청년회는 한국 불교의 보종(保宗)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는 임제종 운동 당시의 의식 기반과 당시 조직된 영호남 중심의 ‘조선불교청년회’의 선행 조직의 경험 등이 기초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6월 20일 서울 각황사에서 창립한 조선불교청년회는 창립 직후 서무부(庶務部), 이재부(理財部) 전무 간사와 상무 간사제를 두어 간사제(幹事制)로 운영되었으며 총 31명의 간사를 선정하였다. 1924년 1월경에 총재제(總裁制)로 변경하였고 그 산하에 교육부, 포교부, 문예부, 체육부, 서무부, 재무부로 6부를 두었다. 그러나 다소 활동이 침체되면서 1928년에 다시 간사제로 전환하였다. 이 체제는 1931년 조선불교청년총연맹으로 전환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불교청년회는 창립 이후 례회(例會)[토론회], 강연회, 순회 강연회, 교육 사업, 불타 강탄 기념 축제, 운동 경기 등을 주관하였고, 유신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유신 운동은 일제의 사찰 정책을 극복하여 한국 불교의 자주적인 활동을 기하고, 사찰령 철폐 운동을 구현하였다. 유신 운동은 1920년 초반 해인사 승려 이회광(李晦光)이 한국 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병합시키려는 것을 저지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같은 해 6월 22일 집회에서 이회광 일파의 책동에 반대하고 그를 저지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결의하였고, 각 사찰에 이들의 책동에 동조하지 말라는 전보를 보내고 사찰을 순행하며 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유신 불교를 지지하는 25개 단체와 협의를 거친 것이었다. 25개 단체에 범어사지회도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유신 운동은 곧 불교유신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는데, 1921년 12월 20일의 발기 총회를 거쳐, 12월 21일 창립총회에서 규칙 제정 및 임원 선정 등의 회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불교유신회는 1922년 1월 14일 박한영의 사회로 임시 불교 총회를 개최하여 총무원 사업에 적극 나서기로 하였는데, 당시 불교 유신 사업에 동참하는 10본산은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석왕사, 백양사, 위봉사, 봉선사, 송광사, 기림사, 건봉사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본산 주지 간의 인식의 차이로 교무원의 등장과 함께 10본산 중에서 일부가 탈퇴하여 불교 총회를 통하여 성립한 총무원에는 범어사, 통도사, 석왕사 등만 남았다. 당시 범어사 주지였던 오성월(吳性月) 주지는 1922년 5월 29일 주지 총회에서 ‘금번 회의는 일반 승려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연합 제규까지 폐지하였는데 일반 승려의 여론을 무시하니까 참석할 수 없다는 조건을 탈퇴’한다며 교무원 동참을 거부하였다.
총무원의 주축을 이루면서 불교 유신 활동을 하였던 조선불교청년회는 1923년 3월 24일부터 1주일간 개최된 전조선 청년당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 주체 단체로 활동한 조선불교청년당이 종교 문제뿐만 아니라 민족 운동에 대한 급진성과 불교 개혁의 진보성 등에 대해서 논의하자 일제는 집회를 금지시켰다. 그 후 실권을 가진 주지 계층과 교무원 측의 방해에 의하여 1924년경에 불교유신회가 소멸되었고 조선불교청년회는 간판만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1928년 3월 조선불교청년대회가 개최되어 재기하면서 정상적인 활동에 들어갔고,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되었다.
[현황]
조선불교청년회는 전국적으로 지회를 두었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지회는 범어사, 통도사. 은해사, 표충사, 석왕사, 평양, 대구, 해동불교청년회 등이다. 그리고 회원 수는 대략 2,000여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당시 불교계는 이전의 노선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입장과 식민지 불교의 모순을 개선하려는 진보적 입장의 두 조류가 있었다. 전자는 교무원 주도 세력이며, 후자는 총무원 주도 세력으로 조선불교청년회 및 불교유신회가 가세하였다. 그러나 1925년 이후 일제 식민지 불교를 비판하는 경향이 위축되면서, 진보적인 불교 청년운동은 간판만 유지하는 상태로 변질되었다.
조선불교청년회의 활동은 일제와 일제에 기생하고 있던 일부 주지 계층의 탄압과 반대로 인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이들의 활동과 정신은 이후 조선 불교 선교 양종 승려 대회와 총본산 건설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등 불교계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범어사는 민족 사찰로서 불교 수호뿐만 아니라 민족 해방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