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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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履儉 |
영어음역 | Jeong Igeom |
이칭/별칭 | 원례(元禮)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례(元禮). 고조할아버지는 정만화(鄭萬和)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정재해(鄭載海), 할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정시선(鄭是先), 아버지는 정석년(鄭錫年)이다. 어머니는 이세태(李世泰)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이검(鄭履儉)은 1695년(숙종 21)에 태어났다. 1730년(영조 6)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1734년 예문관 대교, 1736년 암행어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1737년(영조 13) 홍문관에서 부수찬·교리·수찬을 지냈으며, 1741년 이조 좌랑과 고산 찰방을 거쳤다.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871]에 수록된 동래 부사 명단에 따르면, 정이검은 1742년(영조 18) 9월 4일 이조 정랑(吏曹正郞)에서 승진되어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몸이 아파서 동래 부사를 사임한 김석일(金錫一)의 후임이었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1743년(영조 19) 6월 10일 동래 부사직을 사임하였다가, 그해 9월 승지가 되었다.
그런데 1744년 8월 동래 부사 때 진행된 일이 발각되어 유배에 처해졌다. 동래 부사 시절 비장(裨將)이 정이검 몰래 이익을 꾀한 일이 발각되면서 변방의 수장으로서 부하들을 잘 살피지 못하였다는 죄를 입었다. 비장은 일본에서 들여오는 공무역 수입품 값으로 지불하는 공작미(公作米)[조세로 받을 목면인 공목(公木) 대신 받은 쌀]를 식리(殖利)의 수단으로 삼았다. 공목을 관리·담당하는 감관(監官) 전우장(田雨章)·김윤하(金潤河)·박태석(朴泰碩)과 함께 몰래 공작미를 파는 방법이었다. 쌀을 판 돈의 반은 원래의 쌀을 채우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돈은 서로 나누어 썼다. 그런데 횡령한 쌀의 양이 너무 많아 원래의 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쌀을 일본인에게 줄 수밖에 없었고, 이 일을 알아챈 정이검의 후임인 동래 부사 김한철(金漢喆)이 조정에 장계를 올리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일로 공목 감관 3명은 모두 효시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절도(絶島)에 보내져 종이 되었으며 정이검은 금천(衿川)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동래 부사를 지낸 사람 중 범죄에 연루된 자들은 10년을 한정하여 법에 따라 처단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1746년(영조 22) 대사간, 1748년 좌승지·승지·호조 참의, 1751년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54년(영조 30)에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정이검이 동래 부사로 재직할 때 동래부민의 부역을 크게 경감시켜 준 공덕을 기려 그가 떠난 10년 후 지역 사람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1482-2번지에 동래부 7개 면민들이 힘을 합쳐 1754년 8월에 세운 ‘동래 부사 정이검 청덕 선정 만고 불망비(東萊府使鄭履儉淸德善政萬古不忘碑)’가 서 있다.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주도로인 황산도(黃山道) 옆에 세워졌다가 2010년 도로 확장 공사로 현 위치로 옮겼다.
@@GC04206491_01_정이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