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전방 입소 교육 거부 투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472
한자 前方入所敎育拒否鬪爭
영어의미역 Struggles against the Military Camp Education for Student Son the Front Line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생 운동
관련인물/단체 동아대학교|경성대학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6년 4월 25일연표보기 - 동아대학교, 산업대학교 전방 입소 교육 거부를 위한 연합 시위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86년 4월 28일연표보기 - 동아대학교 학내 시위 전개
발단 시기/일시 1986년 - 전국적으로 전방 입소 교육 거부 투쟁 전개
발생|시작 장소 구덕야구장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210지도보기
종결 장소 동아대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1지도보기

[정의]

1986년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대학생의 전방 입소 교육 거부 투쟁.

[역사적 배경]

전방 입소 교육이란 최전방 군부대에서 받는 1주일의 군사 훈련으로 교련 학점을 취득하는 교과 과정이었다. 따라서 대학 내에서 전방 입소는 반공 교육을 통해 사회 비판적인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인식되었고, 학생 운동 진영에서는 남한의 군사 역량 강화는 결국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 기지로서의 역할이 강화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이에 1986년 4월 전국의 대학에서 전방 입소 교육 거부 투쟁이 벌어졌다. 특히 4월 28일 서울대학교에서 김세진과 이재호가 경찰의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진압에 항의하며 “전방 입소 결사반대, 반전 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하면서 전방 입소 교육 거부 투쟁은 정점을 이루었다.

[경과]

부산에서는 4월 25일 동아대학교와 산업대학교[현 경성대학교]의 연합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전국 체전 대학 야구 부산 대표 선발전 결승전이 벌어진 구덕운동장에서 동아대학교와 산업대학교의 경기가 끝난 후 운동장을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1,000여 명이 넘는 두 학교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1시간 30분 이상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투입되어 1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함으로써 시위는 진압되었지만, 시위 학생 가운데 일부는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기도하다가 국도극장 앞에서 다시 1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고서야 마무리되었다.

동아대학교에서는 25일에 이어 28일에도 교내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동아대학교 학생 200여 명은 대신동 캠퍼스의 도서관 앞 광장에서 ‘폭력 사례 보고회 및 폭력 규탄 실천 대회’를 마치고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승리의 노래’ 등이 적힌 유인물을 뿌리며 교문 돌파를 시도했지만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막히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전국에서 14개 대학 8,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폭력 사태 규탄 및 ‘강제 징집 철회’, ‘연행 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교내외에서 시위를 벌였다.

[결과]

전방 입소 교육 거부 투쟁 이후 대학가에서는 ‘반미(反美)’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또한 억압적인 군사 훈련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학생들의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전방 입소 교육은 일부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병역의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 모든 남자 대학생의 문제였다. 이 때문에 일반 학우들의 호응과 참여가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따라서 이는 학내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는 문제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