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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길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419
한자 任龍吉
영어음역 Im Yonggil
이칭/별칭 풍천용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친일파
성별
본관 풍천(豊川)
대표경력 부산청년회 간부|신간회 부산지회 집행 위원장|동아신문사 대표|동아 시보 대표
출생 시기/일시 1898년 5월 4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8년 3월 -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8년 3월 31일 - 부산공립보통학교 훈도에 임용
활동 시기/일시 1921년 2월 - 민족부활단결사대 활동으로 검거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3년형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3년 4월 - 가출옥함
활동 시기/일시 1924년 5월 - 부산청년회 사회부 간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5년 2월 - 보천교 박멸 사건으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25년 9월 -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형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 부산청년동맹 창립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부산청년동맹 집행 위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9년 2월 - 신간회 부산지회 부회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2월 6일 - 신간회 부산지회 집행 위원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5월부터 1934년 3월까지 - 『동아 일보』 울산 지국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5년 1월 - 『동아 신문』을 발간. 사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일본 중의원 선거 아이치 현 출마해 낙선함
활동 시기/일시 1943년 7월 - 『대륙의 적성』 출간
활동 시기/일시 1943년 10월 - 『동아 신문』 폐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2월 - 『동아 시보』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일본에서 『동아 신문』 운영
몰년 시기/일시 1979년 7월 10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임용길 출생지 - 평안북도 영변
학교|수학지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 - 평안남도 평양
활동지 부산공립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

[정의]

1920년대 부산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말 변절한 친일 언론인.

[활동 사항]

임용길(任龍吉)[1898~1979]은 본관이 풍천(豊川)이며, 창씨명은 풍천용길(豊川龍吉)이다.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1918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뒤 3월 31일 부산공립보통학교 훈도에 임용되었다. 1920년 10월 18일 친일파 처단의 내용을 담은 민족부활단결사대 명의의 경고문을 부산경찰서를 비롯한 부산 지역 관공리 유력자에게 발송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1년 4월 21일 검사국으로 송치된 뒤 부산지방법원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3년 4월 가출옥한 후 청년 운동을 전개하여 1924년 5월 부산청년회 사회부 간사를 맡았다. 1925년 2월 부산청년회의 보천교 박멸 사건 주모자로 다시 체포되었다. 1925년 9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6년 7월 가출옥하였다. 1927년 12월 부산청년동맹 창립을 주도하였고, 1929년 부산청년동맹 집행 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경남청년연맹 발기준비회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산지회 제2회 정기 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 12월 6일 제5차 정기 대회에서 집행 위원장이 되었다. 임용길은 1920년대 사회 운동을 하면서 형제들과 함께 양복부·자동차부 등을 거느린 학옥양행(鶴屋洋行)을 경영하였다.

신간회 해소 후 1931년 5월부터 1934년 3월까지 『동아 일보』 울산 지국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일본 나고야로 건너가 『동아 일보』와 『조선 신문』 나고야 지국에 관계하였다. 1935년 1월부터 1943년 10월 폐간할 때까지 나고야에서 『동아 신문』을 발간하고 사장을 지냈다. 『동아 신문』은 황민화 정책을 아래로부터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특히 친일협화회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상애회의 간부이자 일본 중의원 의원이던 박춘금이 당시 『동아 신문』의 상담역이었다. 임용길은 신문을 통해 내선 일치를 강조하고 대동아 공영권 확립에 정진해야 함을 역설하는 등 친일적 논설들을 게재하였다. 1942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 아이치 현 제1선거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뒤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재일 동포 귀환과 식량 배급 문제에 대해 일본 당국과의 교섭 대표단에 나고야 대표로 파견되었다. 1948년 12월 『동아 시보』를 창간하여 대표를 지냈다. 195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속간된 『동아 신문』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1979년 7월 10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43년 7월 황군 위문 현지 보고서인 『대륙의 적성』을 동아신문사에서 출간하였다.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에 묻혔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나, 2011년 친일적 논설 게재와 친일협화회 지원 활동 등 친일 행적으로 서훈이 취소되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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