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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384
한자 李廷植
영어음역 Yi Jeongsik
이칭/별칭 요한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 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천주교 신자|순교자
성별
출생 시기/일시 1794년연표보기 -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68년 8월연표보기 - 처형됨

[정의]

1868년 부산 수영 장대골에서 참수된 천주교 순교자.

[활동 사항]

이정식(李廷植)[1794~1868]은 무인 가문의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동래 병영의 장교를 지냈다. 59세에 이르러 부인 홍주 출신 박씨의 권고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세례명은 요한이다. 입교한 뒤에는 무관직을 사임하고 천주교의 일부일처의 가르침대로 첩을 내보내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면서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동래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였다. 1868년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거세어졌다.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 이정식 가족이 울산으로 피신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포졸들이 울산까지 와서 이정식 가족을 체포하여, 동래 부사의 관아로 압송하였다.

동래 부사는 이정식을 동래 지역 천주교 공동체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47일간 옥에 가두고 여러 차례 심문하였다. 이정식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 많은 신자들을 권면하고 가르쳤다고 시인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 이외의 교우들이 사는 곳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다. 크나큰 고통의 형벌을 받았지만, 끝내 배교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 냈다.

동래 부사는 이정식을 비롯한 가족을 경상좌수사 구주원(具胄元)에게 넘겨 사형시키도록 하였다. 이정식과 가족은 수영 장대(水營場臺)로 압송되어 사형[참수(斬首)]에 처해졌다. 그때가 1868년 8월이며, 나이는 74세였다. 순교한 후 시신은 인근 사형장 근처에 안장되었다.

[사상과 저술]

60세 이후 천주교 사상에 깊이 천착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익히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천주교의 가르침대로 일부일처제, 검소한 생활, 자선을 통한 사랑을 실천하며 천주교의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로 굳건하게 천주교 신앙을 지켰다. 저서는 전하지 않는다.

[묘소]

1868년 순교한 후 사형장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 후 후손의 도움으로 명장동 갈멜 수녀원으로 옮겨졌다가, 도시 개발로 1977년 오륜대 순교자 기념관 뒷동산으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2002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하느님의 종 124위’에 포함시켰고, 지금은 바티칸 시성성에서 시복 청원 심사 중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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