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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반대 시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353
한자 維新反對示威
영어의미역 Anti-Yushin Revitalizing Reform Constitution Street Demonstr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생 운동
관련인물/단체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부경대학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4년 10월 16~17일연표보기 - 동아대학교 학생 교내 시위
종결 시기/일시 1974년 11월 8일연표보기 - 동아대학교 무기 휴강, 시위 주동자 처벌
발단 시기/일시 1973년 12월 1일 - 부산대학교 학생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74년 10월 30일 - 수산대학교 학생 교내 시위, 단식 농성
전개 시기/일시 1974년 11월 7~8일 - 동아대학교 학생 시위, 농성
발생|시작 장소 동아대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3가지도보기
종결 장소 동아대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3가 1지도보기

[정의]

1973~1974년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전개한 유신 반대 시위.

[역사적 배경]

1970년대 초 학생 운동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은 유신 체제 하의 억압 속에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긴급 조치로 상징되는 극도의 억압 통제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고조되었고, 특히 1973년 김대중 사건과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사건으로 한국 정부는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였다. 이에 1973년 시작된 유신 반대 운동은 1974년 8월 23일 긴급 조치 4호가 해제되면서 전국적으로 재연되었다.

[경과]

1973년 12월 1일 부산대학교에서 유신 체제의 출범 이후 부산 최초의 유신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1,500명의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11월 30일부터 시작된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학원의 자유 보장’, ‘구속 학생 석방’ 등 5개 항을 결의하고 교내 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경에는 남포동 부영 극장 앞에서 7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974년 8월 23일 긴급 조치 4호가 해제되자 대학생들은 다시 움직였다. 10월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등지에서 전개된 교내 시위는 지방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10월 16일 정오를 전후하여 동아대학교 법정대 학생 200여 명은 ‘구속학생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10월 17일 동아대 시위는 이상석[국문과 2년]이 작성한 시국 선언문을 낭독한 뒤 문리대와 법정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문리대 학생 300여 명은 강의실에 모여 애국가 등을 부르며 구속 학생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틀에 걸쳐서 시위가 발생하자 동아대학교 당국은 즉각 휴강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강경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위의 열기는 계속 이어졌다. 10월 30일에는 수산대학교[현재의 부경대학교] 학생 34명이 교내 시위를 벌이고 일부는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다. 11월 7일 데모는 더욱 격화되어 동아대학교 학생 900여 명은 ‘유신철폐’, ‘중앙정보부 해체’, ‘특권층 재산 공개’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인 후 처벌 학생 구제, 학생 회칙 개정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이튿날까지 철야농성을 벌였다.

[결과]

11월 8일 동아대학교는 무기 휴강을 결정하고, 학생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총 학생 회장 윤광준과 대의원 의장 박정근 등 2명을 퇴학 처분하고, 김근철 등 8명을 근신 조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유신 체제 하의 극도로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서 전개된 부산 지역 학생들의 유신 반대 투쟁이라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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