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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137
한자 信託統治排擊運動
영어의미역 Anti-trusteeship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철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 운동
관련인물/단체 김철수|노백용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5년 12월 30일연표보기 - 신탁통치배격 인민대회준비회 결성
종결 시기/일시 1946년 1월 11일연표보기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 부산시위원회 결성
발단 시기/일시 1945년 12월 27일 -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안 논의
전개 시기/일시 1946년 1월 1일연표보기 - 신탁 통치 절대 배격 부산 시민대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46년 1월 3일 - ‘신탁통치배격 부산시위원회’ 조직 개편 실시
전개 시기/일시 1946년 1월 7일 - 우익 인사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 경상남도위원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46년 1월 9일 - ‘3상 회의의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 내용 검토회’ 개최
발생|시작 장소 소개 시장 - 부산광역시
종결 장소 조선 극장 - 부산광역시

[정의]

1945년 12월부터 부산에서 전개된 신탁 통치에 대한 반대 운동.

[역사적 배경]

1945년 12월 27일 개최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안이 논의되었다. 그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신탁 통치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한국에서는 대대적인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 진영은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대한 반대[반탁]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미·영·중·소 4국이 후원하여 한국이 조속히 독립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진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 ‘3상 회의 결정 지지’로 돌아섰다.

『동아 일보』는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에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는 오보를 고의적으로 게재하였다. 이에 우익 진영이 좌익의 입장을 신탁 통치에 대한 찬성, 즉 ‘찬탁’이라고 부르며 ‘찬탁은 곧, 매국’이라 주장하게 되면서 신탁 통치 배격 운동의 좌우 협조 노선이 붕괴되었다.

[경과]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전해지자 초기에는 부산과 경상남도의 정치·사회단체는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3상 결정=탁치’로 인식하고, 즉각적으로 맹렬한 신탁 통치 배격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오후 5시 경상남도기자회는 신탁 통치 배격 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방법을 토의하고 결의문을 미·소 양군 사령관에게 전달하였다.

12월 30일 오전 11시부터 부산의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 200여 명은 민주중보사에 모여 “신탁 통치를 결의한 연합국 3상 회의의 배신행위에 대하여 민족 생명의 전체를 내걸고 이를 배격하고 자주 독립의 실현을 위하여 단호히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신탁통치배격 인민대회준비회’를 결성했다. 또 같은 날 도청 직원이 총사직하였고, 미군정 부산세무소, 미군정 부산시 직원, 일본 재산관리위원회의 한국인 직원, 체신국 전 종업원과 우편국 검열국 직원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으며,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경상남도 지부와 도내 각 금융 조합, 창기 조합, 영화관과 음식점도 휴업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소개 시장(疏開市場)[현 국제 시장]에서 ‘신탁 통치 절대 배격 부산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대회에는 부산경찰서, 북부산경찰서, 수상경찰서 등 경찰 관계자가 참가하였고, 소년들까지 참가하여 탁치 반대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날 시민대회에는 130여 단체와 15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결과]

시민대회 직후 1946년 1월 3일 ‘신탁통치배격 부산시위원회’는 조직 개편을 실시하여 위원장에 김철수(金喆壽), 부위원장 노백용(盧百容) 이하 각 부서 및 간부를 인선하였다. 이는 최초 ‘신탁통치배격 인민대회준비회’ 단계와 비교해 볼 때, 최석봉·박희창·최수법 등 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 연합 등에서 활약하는 우익 인사를 대거 탈락시키고 대부분 좌익 성향의 인물들로 채운 것이었다.

이에 반해 우익 인사들은 1월 7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 경상남도위원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구성하고, 신탁 통치를 절대 배격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권 활동을 옹호한다고 발표하였다. 1월 11일 조선 극장에서 각 정회(町會)·단체 대표자와 청중 2,000여 명이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 부산시위원회’를 결성하고 김삼도(金三道) 위원장 등을 선출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상과 같이 1945년 12월 30일의 ‘신탁통치배격 인민대회준비회’와 1946년 1월 1일 ‘신탁 통치 절대 배격 부산 시민대회’ 시점까지도 3상 회의에서 ‘탁치’ 운운하게 된 원인이 민족 통일 전선이 결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인식하면서 인민 공화국과 임시 정부를 동시에 해산하고 장차 조선에 수립될 민주주의 정부의 모태를 만들자고 주장해 오던 신탁 통치 배격 운동 세력이 좌우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로써 좌우의 신탁 통치 배격 운동은 ‘신탁 통치 배격’이라는 하나의 목소리 속에서 대립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1946년 1월 9일 오후 2시에 개최된 ‘3상 회의의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 내용 검토회’를 통해 좌익 세력은 “무조건 신탁 반대라는 미명하에 3상 결정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이후 “신탁 통치는 배격하나 3상 회의를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함으로써,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을 지지할 것과, 이를 ‘탁치=매국’의 논리로 공격하는 우익 세력의 파쇼적 음모를 천하에 폭로하고 배격할 것임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좌익 세력의 움직임은 좌익 세력 연합에 의한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한편, 1946년 1월 9일 조선청년단은 총기를 소지한 채 부산 소재 도인민위원회와 시인민위원회를 습격하여 4명의 사상을 낸 것을 시작으로 경상남도 각지에서 우익 세력에 의한 좌익 단체 테러가 난무하였다. 우익 세력의 좌익 습격은 탁치 논쟁을 거치면서 우익이 정치적 명분을 가질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초기 신탁 통치 배격 운동은 좌우 세력이 공히 ‘인공과 임정을 동시에 해체하자’는 데 합의하고 함께 행동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는 중앙과도 다른 독특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는 곧 좌우 대립의 도화선이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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