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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국보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017
한자 善隣國寶記
영어의미역 Seollin Gukbog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편자 즈이케이 슈호[서계주붕]
권책 3권
저술 시기/일시 1466년~1470년연표보기 - 저술
편찬 시기/일시 1470년연표보기 - 저술 완성
간행 시기/일시 1657년연표보기 - 목판본
특기 사항 시기/일시 일본 서적

[정의]

일본 승려 즈이케이 슈호가 부산포를 경유하는 사절 등 일본의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대외 관계사에 관하여 편저한 외교 문서집.

[저자]

즈이케이 슈호[瑞溪周鳳, 1392~1473]는 임제종 승려로, 1406년(태종 6) 일본 교토(京都) 상국사(相國寺)에서 출가하였다. 1440년(세종 22) 제50대 상국사 주지가 되었고, 1446년(세종 28) 10월 상국사 녹원원 월주 겸 승록에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하였다. 무로마치[室町]막부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에게 중용되어 막부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 속성(俗姓)은 대반씨(大伴氏), 법휘(法諱)는 주봉, 도호(道號)는 서계이며, 와운산인(臥雲山人)이라고도 불린다. 시호는 흥종명교선사(興宗明敎禪師)이다.

[편찬/간행 경위]

즈이케이 슈호는 막부에 중용된 후 1464년(세조 10) 명나라로 보내는 표(表) 작성을 계기로 외교 문제에 관심을 나타냈으며, 이후 『선린국보기(善隣國寶記)』 편찬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 편찬 시기는 『선린국보기』에 실려 있는 자서(自序) 및 후기(後記)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서에 “문정용집병술 팔월십일 천남와운산인(文正龍集丙戌八月十日 泉南臥雲山人)”이라고 되어 있고, 중권(中卷) 후기에는 “문명이년 용집경인 납월이십삼일 와운팔십옹서계주봉서우선린국보기후(文明二年 龍集庚寅臘月二十三日 臥雲八十翁瑞谿周鳳書于善隣國宝記後)”라고 되어 있다. 문정용집병술은 1466년(세조 12)이며, 문명 2년은 1470년(성종 1)이다. 1466년 8월에는 고대부터의 외교 문서를 정리하여 책의 초본을 완성하고 자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1466년 8월 이후 1470년 12월까지 4년간은 초본에 증보(增補)를 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책의 완성 시기는 후기를 쓴 1470년 12월 23일이라고 추정된다.

[형태/서지]

상·중·하 세 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상권은 1359년부터 1392년까지 대부분 일본과 중국과의 외교를 다루었다. 중권은 1398년부터 1475년까지, 하권은 1433년부터 1486년까지의 기록으로 일본과 명, 일본과 조선의 왕복 문서를 수록하였다. 일부 문서는 1474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 있는데, 즈이케이 슈호 사후에 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활자본은 『속군서유종(續群書類從)』 잡부(雜部), 『개정 사적집람(改定 史籍集覽)』, 『신정 선린국보기(新訂 善隣國宝記)』, 『선린국보기·신정 속선린국보기(善隣國宝記··新訂 續善隣國宝記)』에 수록되어 있다.

일본 에도[江戶] 시기에는 『속선린국보기(續善隣國宝記)』란 외교 문서집이 편찬되었는데, 앞 시기인 무로마치 시기의 『선린국보기』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성/내용]

이 책에는 고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고간 국서(國書)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 전기의 것은 1392년(태조 1), 1398년(태조 7), 1409년(태종 9), 1422년(세종 4), 1423년, 1424년, 1425년, 1428년, 1439년, 1440년, 1456년(세조 2), 1459년, 1460년, 1461년, 1466년, 1470년(성종 1), 1472년 등에 작성된 것이다.

이 문서는 대부분 막부 장군과 조선 국왕의 명의로 작성된 국서이다. 조선에서 일본에 보낸 문서의 내용은 왜구 방지 요청과 통신사 등 사절 파견과 관련된 의례적 내용 등이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보낸 문서의 내용은 막부 장군 교체 알림, 조선의 대장경(大藏經) 요청, 일본 사찰의 수리에 필요한 비용 요청, 일본과 명의 단절된 관계를 재개하기 위한 조선의 중재 요청, 조선과 일본의 우호 다짐 등의 내용이다.

이 문서는 외교 문서 본문과 예단[별폭(別幅)]은 수록되어 있으나 사절의 여정은 적혀 있지 않다. 『선린국보기』에 수록된 1459년의 국서는 세조가 일본 막부 장군에게 보내는 것으로 그 관련 내용이 『세조실록(世祖實錄)』 5년 4월 16일[정묘]에 수록되어 있다. 이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간 사절은 노원(盧圓)이며, 사절 일행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포에 머물고 있었다. 세조의 회답 국서와 예물을 부산포에서 받고 출발하였다. 또한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일본 국왕사(國王使) 범령(梵齡)이 부산포에서 죽었다는 기록 등을 보아 부산포는 일본 국왕사가 정박하는 중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선린국보기』는 무로마치 막부의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일본 승려의 입장에서 막부 외교를 조명한 점이 특이하다. 일부 외교 문서의 내용은 조선의 실록에서 찾을 수 있지만, 실록에는 없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사절 왕래 및 사절의 이름 등을 알 수 있는 외교 문서도 다수이다. 무엇보다 양국 사이에 오고간 국서 및 외교 문서의 형식 및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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