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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갔던 선비들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008
영어의미역 Scholars Who Have Visited Seoul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기장군 장안읍 효암리|철마면 안평리
집필자 곽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요|노동요,
기능구분 농업 노동요
형식구분 교환창|독창
가창자/시연자 윤필순[여, 71]|이보금[여, 77]|이진숙[여, 85]
채록 시기/일시 1987년 9월 27일 - 윤필순[여, 71]으로부터 채록
채록 시기/일시 2002년 5월 19일 - 이보금[여, 77]으로부터 채록
채록 시기/일시 1999년 10월 24일 - 김상용·박정민·정래권·송미화 등이 이진숙[여, 85]으로부터 채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2년 12월 10일 - 김승찬·박경수·황경숙 공저, 『부산 민요 집성』에 수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10년 2월 28일 - 류종목, 『현장에서 조사한 구비 전승 민요』-부산편에 수록
채록지 죽전 마을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채록지 효암리 -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채록지 안평 노인정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기장군에서 논에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노동요.

[개설]

「서울 갔던 선비들아」는 주로 모내기를 할 때 현장에서 부르는 농업 노동요이다. 모를 심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하기에 「서울 갔던 선비들아」를 교환창으로 불러 모내기의 효율성을 높였다.

[채록/수집 상황]

2002년 김승찬·박경수·황경숙 등이 집필하고 세종출판사에서 발행한 『부산 민요 집성』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1987년 9월 27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죽전 마을에서 주민 윤필순[여, 71], 2002년 5월 19일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에서 주민 이보금[여, 77] 등으로부터 각각 채록한 것이다. 또한 2010년 류종목이 집필하고 민속원에서 간행한 『현장에서 조사한 구비 전승 민요』-부산편에도 실려 있다. 이는 1999년 10월 24일 김상용·박정민·정래권·송미화 등이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 주민 이진숙[여, 85]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구성 및 형식]

「서울 갔던 선비들아」는 교환창 혹은 독창으로 부른다. 과거 갔던 남편이 죽어서 돌아온다는 줄거리의 사설로 되어 있다.

[내용]

1. 윤필순의 「서울 갔던 선비들아」

서울갔던 선부들아/ 우리선부 안오더냐// 오기사야 온다마는/ 칠성판에 실려오네.

2. 이보금의 「서울 갔던 선비들아」

서울갔던 선보네여/ 우리선보 아니오나// 오기는 오건마는/ 칠성나판에 실려온다// 우리선보는 무슨팔자/ 칠성나판에 실려오노.

3. 이진숙의 「서울 갔던 선비들아」

서울갔던 이선부네야/ 우리선부 안오는교// 오리야어이 온다만은/ 칠성판에 실려온다// 서울가는 선부님요/ 우리선부 어딨는교// 오기야 온다만은/ 칠성판에 실려오요.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이앙법(移秧法) 또는 모내기는 모판[못자리]에서 싹을 틔운 모[육묘]를 논에 심는 농작법이다. 씨 뿌린 자리가 작아야 잡초 손질하기도 쉬워 관리하는 데 편하다. 하지만 모내기철 가뭄에 주의하여야 하고, 모판에서 본 논에 옮기는 데 노동력이 많이 든다. 모심기를 하기 전에 모판에서 모를 찌는 과정이 있는데, 이것을 ‘모찌기’라고 한다.

모심기를 할 때는 먼저 논을 가로질러 못줄을 하나나 두 개 치고 양쪽에서 ‘줄잡이’라 부르는 사람이 줄을 잡는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이 줄을 따라 늘어선 다음 못줄에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모를 심어 나간다. 일단 모심기를 시작하면 늘어선 사람들은 일정한 속도에 맞춰서 동시에 모를 심어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줄 전체가 어그러진다. 따라서 모심기를 할 때에 선후창이나 교환창으로 「서울 갔던 선비들아」를 불러 일하는 사람들의 손을 맞추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남자와 여자로 패를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현황]

농업이 기계화가 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호흡을 맞추어 모내기를 해야 했던 까닭에 「서울 갔던 선비들아」를 불렀다. 그렇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작업이 기계화되었고, 모내기 역시 이앙기의 보급으로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아 「서울 갔던 선비들아」의 전승이 끊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서울 갔던 선비들아」는 과거를 보러 갔던 남편이 죽어서 돌아온다는 사설의 내용으로 보아 서사 민요의 일부분을 따서 부른 노래로 여겨진다. 이를 통하여 「서울 갔던 선비들아」의 사설이 다른 다양한 민요의 사설들을 차용하여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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