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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 쇠미산의 절터와 삼신제왕 바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960
한자 社稷洞-山-三神帝王-
영어의미역 Temple Site and Samsinjewang Rock in Seomi Mountain in Sajik-dong
이칭/별칭 「절터와 삼신제왕 바위」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전설
주요등장인물 청년 7명
모티프유형 징벌|기자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3년 12월 30일 - 『동래 향토지』에 「절터와 삼신제왕 바위」라는 제목으로 수록
관련 지명 쇠미산 절터 -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산 91-7지도보기
관련 지명 석사 부락 -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석사 마을
관련 지명 삼신제왕 바위 - 쇠미산 절터 뒷편
채록지 사직동 -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에서 쇠미산 절터와 삼신제왕 바위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사직동 쇠미산의 절터와 삼신제왕 바위」는 절을 허물려고 했던 석사 부락[현재 동래구 사직동 석사 마을] 청년들이 발래[해산물 채취 작업]를 하러 갔다가 익사했다는 부처님의 징벌담이자, 절터 뒤편의 삼신제왕 바위에 정성을 빌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기자 바위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3년에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간행한 『동래 향토지』에 「절터와 삼신제왕 바위」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채록 시기와 채록자는 분명하지 않다.

[내용]

약 200여 년 전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쇠미산의 중턱에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 석사 부락 청년 일곱 명이 마을 뒷산에 절이 있어 재수가 없고 재앙이 있다고 하여 밧줄과 괭이로 그 절을 허물어 버리고자 했다. 절을 허물기로 한 날 청년 중 한 명이 우연히 몸이 아파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듬해 정월 보름날 일곱 명의 청년들이 수영 앞바다에 발래를 하러 갔는데, 그날도 몸이 아팠던 청년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머지 청년 여섯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그날 바다에 풍랑이 일어 청년 여섯 명이 모두 익사해 버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절을 허문 일로 부처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다.

한편, 쇠미산의 그 절터 뒤편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를 삼신제왕 바위라고 부른다. 자식 갖기를 원하는 부인이 첫 새벽에 이 바위 아래에 정화수를 놓고 빌면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을 지켜본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여인들이 바라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사직동 쇠미산의 절터와 삼신제왕 바위」의 주요 모티프는 ‘징벌’, ‘기자’ 등이다. 옛날 사람들은 신성한 곳을 함부로 훼손하면 신에게 벌을 받는다고 믿었는데, 「사직동 쇠미산의 절터와 삼신제왕 바위」는 재수가 없고 재앙이 있다고 하여 함부로 절을 허물고자 하였다는 점에 대한 징벌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특히 청년 여섯 명이 함께 익사하여 죽은 것을 절을 훼손해서 얻은 벌이라고 믿은 것으로 보아, 이곳 사직동 주민들은 쇠미산 암자를 신성한 곳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존하는 쇠미산 절터와 기자 바위 성격을 갖는 삼신제왕 바위를 증거로 제시하여 전설의 진실성을 높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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