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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고분군 출토 덩이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779
한자 釜山福泉洞古墳群出土-
영어의미역 Iron Plates Excavated from the Tombs in Bokcheon-dong
이칭/별칭 복천동 고분군 출토 덩이쇠,부산 복천동 고분군 출토 철정,부산 복천동 고분군 출토 철정 일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로 66[복천동 50]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현주 2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덩이쇠|철정
재질
크기 42㎝~48㎝[부산 복천동 고분군 22호 출토 덩이쇠 길이]|10㎝~13㎝[부산 복천동 고분군 22호 출토 덩이쇠 최대 폭]|6㎝~8㎝[부산 복천동 고분군 22호 출토 덩이쇠 최소 폭]|19㎝~25㎝ 내외[부산 복천동 고분군 11호 출토 덩이쇠 전체 길이]|4㎝~6㎝ 내외[부산 복천동 고분군 11호 출토 덩이쇠 최대 폭]|2.4㎝~4㎝ 내외[부산 복천동 고분군 11호 출토 덩이쇠 최소 폭]
출토|발굴 시기/일시 1980년~2008년연표보기 -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 대한 제1차~제8차 발굴 조사 시 발견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1년 6월 9일연표보기 -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 제273호로 지정
현 소장처 부산대학교 박물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30지도보기
현 소장처 복천박물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지도보기
원소재지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232
출토|발견지 부산 복천동 고분군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삼국 시대의 덩이쇠.

[개설]

덩이쇠[鐵鋌] 출현 이전에는 판 모양 쇠도끼[판상 철부]가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 소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4세기 후반이 되면서 낙동강 하류역의 부산과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형태의 덩이쇠가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부산과 김해 지역 내에서도 동일한 규격의 덩이쇠로 제작되지 못한 점으로 볼 때 생산과 소비의 단위가 지역마다 달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라 지역에서는 4세기 대의 덩이쇠는 경주 구어리 유적 출토품을 제외하고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고, 5세기 대에 들어서서야 황남 대총(皇南大塚)과 같은 대형 왕릉 무덤에서 대량의 덩이쇠가 확인된다. 가야 지역에서는 5세기가 되면서 창원, 함안, 마산, 의령, 고성 등지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덩이쇠는 형태와 출현 시기에 따라 판 모양 쇠도끼형[판상 철부형] 덩이쇠, 덩이쇠, 막대 모양 덩이쇠 등으로 구분된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제273호]에서 덩이쇠의 출토 양상은 시기적인 변화 과정을 보인다. 즉 4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81·38호에서는 미늘쇠, 종장판갑, 궐수문 쇠투겁창[철모] 등 여타 부장품과 함께 판 모양 쇠도끼형 덩이쇠의 형태로 출토되었으며, 4세기 후엽~5세기 중엽에는 전형적인 덩이쇠의 형태로 주인공을 위한 관대처럼 사용되어 무덤의 바닥에 철도 레일처럼 10매 단위로 깔아 놓았다. 이와 같은 예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11호, 21·22호, 46호, 53호, 71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5세기 후엽~6세기 초가 되면 다시 여타 부장품과 함께 주인공의 발치나, 한쪽 석곽 단벽을 따라 ‘ㄷ‘자 모양으로 매납되는 경향을 띤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출토 덩이쇠[釜山福泉洞古墳群出土鐵鋌]는 4~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1980~2008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 대한 제1~8차 발굴 조사 때 출토되었으며,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복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부산 복천동 고분군 22호에서는 모두 20매의 덩이쇠가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길이가 42~48㎝, 최대 폭[선단부]이 10~13㎝, 최소 폭[중앙]이 6~8㎝이며, 중량은 650~1,000g이다. 이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출토 덩이쇠 중 가장 큰 규격으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 11호 출토 덩이쇠의 네 배에 해당하는 규격이다. 이들 덩이쇠는 양쪽으로 두 줄로 새끼줄을 엮어서 산란되지 않도록 하였고, 이 위에 초본류(草本類)를 깔아 시신을 안치하였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11호에서는 주곽 바닥에서 77매의 덩이쇠가 출토되었는데, 비교적 정연한 상태로 4열을 지어 있었다. 크기는 전체 길이가 19~25㎝ 내외, 최대 폭이 4~6㎝ 내외, 최소 폭이 2.4~4㎝ 내외이며, 중량은 63~160g 등으로 다양하다. 한편, 부산 복천동 고분군 54호의 주곽에서는 막대 모양의 덩이쇠가, 부곽에서는 큰 항아리 속에 10매씩 가죽에 싸서 넣은 덩이쇠 4개가 확인되었다.

[특징]

덩이쇠는 지역에 따른 형태적인 차이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시기적인 변화의 흐름은 파악이 되는데, 4세기 전반에 30~40㎝ 내외로 비교적 큰 규격이던 것이 5세기에 들어서서는 20~25㎝로 정형화된 후 오랜 기간 유지하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가 되면 15㎝ 내외로 점차 작아지는 양상이 보인다.

[의의와 평가]

가야가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한 배경으로 들 수 있는 것이 풍부한 철 생산이며, 이를 증명하는 구체적인 자료가 덩이쇠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변진 조에는 “시장에서 중국의 돈과 같이 사용되고,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철을 실물 화폐처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실제적인 자료가 덩이쇠라고 추정된다는 점에서 화폐로서의 기능이 강조되기도 한다. 또한 무덤에 부장된 양상에서 매지권, 위신재(威信財)적인 성격으로도 평가되고 있으나, 덩이쇠의 용도를 어느 한가지로만 한정 짓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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