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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673
한자 裵貞子
영어음역 Bae Jeongja
이칭/별칭 배분남(裵粉男),배계향(裵桂香),조난석(趙蘭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밀정
성별
본관 김해(金海)
대표경력 동양 극장 대표사원
출생 시기/일시 1870년 2월 23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83년 - 통도사에서 출가
수학 시기/일시 1886년 12월 - 오사카 천황사소학교(天皇寺小學校) 편입
활동 시기/일시 1887년 9월 - 이토 히로부미 밑에서 밀정 교육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05년 10월 - 이토 밀서 사건으로 부산 절영도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918년 10월 - 하얼빈 주재 총영사관 밀정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일본 외무성 촉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1년 3월 -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만주보민회(滿洲保民會)의 총본부 고문으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경무국 촉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경무국 촉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9년 2월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52년 2월 27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학교|수학지 오사카 천황사소학교 - 일본 오사카[大阪]
활동지 부산광역시 영도구

[정의]

개항기 부산 지역의 절영도에 유배되었던 친일 밀정.

[가계]

배정자(裵貞子)는 1870년(고종 7) 2월 23일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김지홍(金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배분남(裵粉南)으로, 1887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가 된 뒤 배정자로 개명하였다.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 현영운(玄暎運)과 재혼한 뒤 이혼하였으며, 현영운과의 사이에 딸 현송자(玄松子) 등을 두었다. 이후 현영운의 후배 박영철(朴榮喆)[일본육군사관학교 15기 졸업. 함북도지사, 중추원참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일본인 오하시[大橋], 은행원 최(崔) 모(某), 전라도 갑부 조(趙) 모(某), 대구 부호의 2세 정(鄭) 모(某)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 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 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화인 이철(李哲)은 그의 딸 현송자의 두 번째 남편이며, 일제 강점기의 영화인 배구자의 고모이다. 배계향(裵桂香), 조난석(趙蘭石) 등으로도 불렸다.

[활동 사항]

배정자는 아버지가 민씨 일파에게 처형된 뒤 죄적(罪籍)에 올라 연좌법에 의해 관비가 된 어머니를 따라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밀양의 기생으로 팔려갔다. 이후 탈출, 1882년(고종 19) 승려가 되어 경상남도 양산군에 있는 통도사에서 출가하였다. 1885년(고종 22) 아버지 친구인 밀양 부사 정병하(鄭秉夏)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김옥균(金玉均)·안경수(安駉壽) 등에게 의탁하였다.

1887년(고종 24) 9월 이토 히로부미 밑에서 밀정 교육을 받은 배정자는 1893년(고종 30)에 귀국해 이듬해 일본군의 군사 탐정으로 청일 전쟁에 참가하였다. 1905년(고종 42) 2월부터 10월까지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으로 부산 절영도에 유배되었다.

1918년 10월부터 1919년 10월까지 중국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의 밀정으로 북만주에서 조선인과 독립운동가의 동정을 정탐했고, 3·1 운동이 일어나자 하얼빈에서 조선인들을 설득해 일을 원만히 해결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1,000원, 일본총영사관으로부터 600원을 기밀비로 받았다.

1921년 일본 외무성 촉탁이 되면서 봉천(奉天)[현 선양] 주재 일본총영사관의 밀정으로 남만주 일대 조선인의 정황을 정탐했고, 이에 대해 상하이 임시 정부는 『독립신문』을 통해 요녀 배정자가 서간도 각지를 순찰한다고 보도하였다. 1921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 1921년 3월에는 친일 무장 단체인 만주보민회(滿洲保民會)의 총본부 고문을 맡았는데, 창설 과정에서 외무성과 교섭해 자금 200만 원을 얻었다. 1924년 4월 만주보민회가 해산되었을 때 배당금으로 225원을 받았다.

1929년에는 경무국 촉탁으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조선인 사회를 정탐하고,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 합명 회사인 동양 극장을 설립하면서 대표사원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도 경무국 촉탁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조선 여성을 동원해 일본군 위문대를 조직한 후 남양군도에서 위문 활동을 벌였다. 해방 후인 1949년 2월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4월에 고령으로 석방되었다. 말년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숨어서 살았다고 전한다. 6·25 전쟁 중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15년 11월에 다이쇼 천황[大正天皇]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고, 1928년 11월에는 쇼와 천황[昭和 天皇]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2(돌베개, 1993)
  •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 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10)
  • 「배정자」(『2007년도 조사 보고서』II-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이유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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