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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기 처 성씨 열녀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672
한자 裵信己妻成氏烈女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a Woman of Chaste Reputation Seong, Wife of Bae Singi
이칭/별칭 증자헌대부 배신기 처 열부 정부인 성씨 정려비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로 210[대연동 568-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진상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열녀비
양식 석비
관련인물 배신기 처 성씨
재질 화강암
크기 기단: 203㎝[가로], 165㎝[세로], 24㎝[높이]|비신: 109㎝[가로], 20㎝[세로], 131㎝[높이]|지주석: 20㎝[가로], 20㎝[세로], 131㎝[높이]|옥개석: 132㎝[가로], |90㎝[세로], 50㎝[높이]
소유자 부산광역시청
관리자 부산광역시립박물관
건립 시기/일시 1698년연표보기 - 건립
이전 시기/일시 2010년 5월 31일 -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이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 보수
보수|복원 시기/일시 1942년연표보기 - 재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98년 - 배신기 처 성씨 정려됨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립박물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로 210지도보기
원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 탑동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있는 조선 후기 배신기(裵信己) 처 성씨 열녀비.

[건립 경위]

배신기 처 성씨는 평소 성품이 순후하고 시부모를 잘 모셔 효부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남편이 학질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여 10년이나 더 살 수 있게 하였다. 성씨의 이 같은 노력에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에 지역 사림이 발의하여 1698년(숙종 24) 정려되었고, 배신기 처 성씨 열녀비(裵信己妻成氏烈女碑)를 세웠다. 배신기 처 성씨 열녀비는 1904년 중수하였으나 훼손되어 1942년 다시 세웠으며, 2010년 5월 31일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이건하였다.

[위치]

배신기 처 성씨 열녀비는 원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탑동 마을의 우체국 뒤편에 있었다. 2010년 5월 31일 녹산 산업 단지 조성으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의 야외 전시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로 210번지이다.

[형태]

원래는 붉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약 30㎡의 사각형 터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비석만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비신(碑身)이 서 있고 그 사방에 기둥 돌[지주석]이 있다. 비신과 기둥 돌 위에 옥개석이 있다. 기단의 크기는 가로 203㎝, 세로 165㎝, 높이 24㎝이다. 비신은 가로 109㎝, 세로 20㎝, 높이 131㎝이며, 기둥 돌은 각각 가로 20㎝, 세로 20㎝, 높이 131㎝이다. 옥개석은 가로 132㎝, 세로 90㎝, 높이 50㎝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증 자헌대부 배신기 처 열부 정부인 성씨 정려비(贈資憲大夫裵信己妻烈婦貞夫人成氏旌閭碑)’라는 비제(碑題)가 세로 두 줄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문봉호(文鳳鎬)가 짓고 조정규(趙定奎)가 쓴 기문이 새겨져 있다. 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의 도리는 성실함뿐이다. 사람이 자신을 돌이켜 그 정성을 다한다면 귀신을 감화시키고 천지도 움직일 수 있다. 가령 옛 열부인 성씨는 역시 그렇게 하였다고 할 만하다.

전날 우리 숙종 무인년[1698]에 정려를 명령하여 김해군 와룡리(臥龍里)에 두었는데, 뒤에 탑동으로 옮겨 세웠다. 그리고 고종 갑진년[1904]에 보수하였는데, 지금 또한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다. 방손인 누군가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만들고자 해서, 목재를 석재로 바꾸고 비도 세우고 비각도 만들면서 나에게 기문을 요구하였다.

내가 그 판면에 새긴 옛글을 살펴보니, 성씨는 본적이 창녕(昌寧)이요, 참의(參議)를 지낸 윤(胤)의 따님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추증된 배신기 공의 처이었다. 타고난 자질이 정숙하여 집에서는 효성과 순종으로 알려졌고,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잘 섬겼으며 남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 이웃 마을에서까지도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학질에 걸려 어떤 약도 효과가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인육(人肉)을 쓰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두 번이나 하였다. 남편이 다시 중풍에 걸려 여러 해 누워 있어도 낫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미음산(美音山) 굴암(窟巖) 기슭에 올라가 호랑이 울음소리도 두려워 않고 안개비의 습함도 아랑곳없이 목욕재계하며 경건히 제사 드리기를 100일이 되자 이내 병이 나았다. 또 몇 년 뒤 남편이 이질에 걸렸고, 병이 낫자 드디어 집 옆 깨끗한 땅에 제단을 쌓고 밤마다 북두칠성께 기도하기를 자신을 대신해서 십 년만 목숨을 연명케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다 남편이 죽게 되자 통곡하며 울다 기절하였다가 깨어났고, 친히 수의를 지어 마지막 보내는 길에 후회 없도록 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곧장 조용히 의로운 길로 갔다.

아! 예로부터 부인들의 정열(貞烈)에 한이 없지만, 성씨처럼 정성을 극진히 다한 경우는 드물 것이다. 남편이 병들자 허벅지 살을 베고, 산에서 제사 지내고,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여러 번 소생시켰으며, 남편이 죽자 슬픔을 참고 예의를 다한 뒤 결국 자기 목숨마저 버렸던 것이다. 조정에서 듣고는 왕께서 그 집을 정표(旌表)하게 하셨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 방후손들이 노력을 다하는 것은 그 지성이 하늘을 움직이고 귀신과 사람을 감동시키지 않음이 없음이니, 그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세도(世道)가 무너지고 강상(綱常)이 몰락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려를 다시 세우는 일은 세상에 남의 부인 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처럼 섬기는 것에 정성을 바치게끔 독려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듣고는 장하게 여겨 드디어 붓을 들어 쓰노라. 임오 12월 16일 남평 문봉호가 기록하고, 함안 조정규가 쓰다[天地之道 誠而已 人能反身而極其誠 則可以感鬼神 可以動天地也 若故烈婦成氏 亦可謂云爾已矣 昔我肅廟戊寅 命旌其閭 在金海郡臥龍里 後移建于塔洞 高宗甲辰 重葺之 今又歲久傾圮 傍孫某某 謀欲堅固不朽 將以石代木 而碑之閣之 徵記於不侫 不侫按其板面舊題 成氏 籍昌寧 參議胤女 贈資憲大夫裵公信己之妻也 天資貞淑 在家以孝順聞 及歸 善事姑嫜 無違夫子 隣里皆稱之 不幸夫遘瘧疾 百藥無功 或云用人肉 可愈 遂割股而進 果得其效 如是者 至再 夫又患風痺 累歲沈綿 至不可醫 遂上美音山窟岩下 不畏虎豹之嘷 不憚霧雨之濕 齋沐虔祭 至百日 乃瘳 又幾年 有痢疾 疾革 遂築壇于家傍淨地 夜夜禱辰 請代以延十年之命 及其盡哭 旣絶而甦 親裁衣衾 送終無憾 三喪畢 乃從容就義 嗚乎 自古 夫人之烈何限 而鮮有如成氏之致極其誠也 夫病而剖股焉 祭山焉 禱辰焉 累得其蘇 夫歿而忍痛焉 盡禮焉 乃隕厥命 聞于朝而王用表宅 迄于今 而傍裔盡力者 莫非至誠之動于天而感神人也 何其偉哉 顧念世壞綱淪 此閭之重建 亦足以風勵夫世之爲人婦者 使之致誠於所天也 余聞而壯之 遂奮筆以書 壬午蜡月 哉生魄 南平 文鳳鎬 記 咸安 趙定奎 書].”

[현황]

배신기 처 성씨 열녀비는 배씨 열녀비로 많이 알려져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에 있을 때는 매년 음력 10월 18일에 동민들이 제사를 지냈다. 부산광역시가 소유하고,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이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배신기 처 성씨 열녀비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역의 유교 문화를 보여 주는 잘 갖추어진 열녀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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