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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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德秀 |
영어음역 | Bae Deoksu |
이칭/별칭 | 배대수(裵大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치안부장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가계]
본관은 분성(盆城).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면 답곡에서 태어났다. 생년월일에 대하여 국가보훈처의 ‘포상자 공적 조서’에는 1895년 5월 22일[양력]로 기재되어 있으나, 일설에는 1894년 2월 13일이라고도 한다. 이명은 배대수(裵大秀)이다.
[활동 사항]
배덕수(裵德秀)는 1919년 4월 2일 임학찬, 박덕수, 송세희 등과 의용대를 조직하여 김해읍 장터에서 군중 40여 명과 함께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검거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김해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1년 6월 김해에 도착한 조선청년회연합회 특별 순회 강연단에 후원금 10원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1921년 12월 배덕수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2차 정기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8월에는 국내에 신사상을 보급하기 위한 사상 단체 북성회(北星會)에 가입하여 국내 순회강연에 협력하였다. 같은 달 배덕수는 북성회와 서울청년회의 알력으로 빚어진 서울청년회 소속 최창익(崔昌益) 구타 사건[일명 장안 여관 사건]으로 손영극(孫永極)·김장현(金章鉉)·김약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5월을 선고받았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배덕수는 당 중앙 개편 운동을 벌이다가 해당(害黨) 행위로 출당되었다. 1925년 11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50인에 선출된 이래 북풍회·화요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의 4단체 합동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표 자격으로 서울청년회와 교섭을 벌이는 등 민족 협동 전선 운동에 투신하였다. 1926년 4월 정우회(正友會) 결성 후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1926년 5월에는 사회주의 잡지인 『해방 운동』 속간에 참여하였다.
이후 배덕수는 한동안 일본 경찰의 탄압에 시달렸다. 1927년 2월 공산주의 활동으로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이어 고려혁명당 사건 관련 혐의가 추가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26년 중국 길림에서 남만주 별동 기관으로 조직된 정통단(正統團)에 가입하여 활동한 혐의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1927년 8월 초에 풀려났다. 그러나 20일도 지나지 않은 1927년 8월 20일에 조선공산당 관련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다시 체포되었다. 이 역시 무죄를 선고받고 1928년 2월에 풀려났다. 1928년 11월 원산에서 또다시 체포되었다.
이외에도 배덕수는 1929년 6월 신간회 설립 이래 최초의 전국 대회인 복대표위원회(複代表委員會)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에 선임되었으며, 1930년 9월 조선일보 부산지국장을 지냈고, 1939년 5월에는 김해읍회 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는 등 왕성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해방 후인 1945년 8월 17일 배덕수는 부산 동래 온천장 동운관에서 개최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치안부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경남본부는 초량의 3·1유치원에 설치되었으므로, 이 시기 배덕수도 부산에서 활동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미군정 실시 이후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배덕수의 정치·사회 활동도 위축되었으며, 6·25 전쟁 기간 피신 후 체포되었으나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한다. 1970년 5월 1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 배덕수의 공훈을 기려 2005년 3월 1일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