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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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相洪 |
영어음역 | Gim Sanghong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인호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으로 국민정신총동원 부산연맹 이사를 지낸 교사이자 관료, 정치인.
[개설]
김상홍(金相洪)은 1893년 3월 19일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22년 당시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경상남도 학무과 시학[장학관]으로 8년간 근무하고, 1929년 거창군 서무주임, 1938년 관선 경상남도 의원에 당선되었다. 김상홍은 조선총독부 정책에 적극 협력하여 일본어의 상용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일선 교육 현장에서 신사 참배를 독려하고 불응자에 대해서는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다. 특히 가미타나[神棚]를 집집마다 설치하도록 강요했으며, 자녀 결혼 시 신사 결혼을 솔선하여 훈8등 공로 훈장을 받았다.
[활동 사항]
김상홍은 1911년 3개월 과정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인 경성사범학교 부속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뒤 교사 및 교육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12년 3월 경상남도 고성의 공립보통학교 부훈도를 거쳐서, 1918년 11월 경상남도 통영의 공립보통학교 훈도 이후 경상남도 배둔공립보통학교,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의 초계공립보통학교[현 초계초등학교] 훈도 겸 교장을 역임하였다. 1923년부터 1929년 4월까지 경상남도 학무과 시학(視學)으로 활동하면서, 1928년 7월에는 경상남도 내무부 지방과 속을 겸직하였다.
교장을 퇴직한 후인 1929년 4월에 김상홍은 경상남도 거창군 속으로 서무주임이 되었는데, 1931년 7월 전라남도 이사관으로 승진한 후 퇴직하였다. 이후 1935년에서 1937년까지 부산제일공립상업학교 및 부산입정상업실무학교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5년 5월 부산부 부회 의원을 거쳐서 1937년 5월부터 1939년 1월까지 관선 경상남도 의원[부산]을 지냈다. 1937년에는 부산 영주정에서 부인 야학교를 설립하였고, 1937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조선상선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1938년 3월 내지 시찰단의 단원으로 이세신궁 등을 참배하였으며, 1938년 8월 국민정신총동원 부산연맹 이사가 되었다. 곧바로 10월에는 조선방공협회 경상남도 연합지부 평의원 및 경상남도 중앙군사원호상담소 참여(參與)가 되었다. 1939년 1월부터 5월까지 잠시 부산부 내무과 주사로서 이세신궁 참배단 단장으로 조선인 부인을 대상으로 이세신궁 참배단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국어[일본어] 상용이나 신사 참배를 독려하고, 가미타나 설치를 장려하였다. 1939년 6월에는 부산부 의회 부의장 선거 부정에 연루되어 1941년 5월 징역 3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1941년 9월에는 통영중학교 설립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부산 초량정 제1 정회 회장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9월에 김상홍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나이는 57세였다. 김상홍은 혐의 중에서 단독 신사 참배 사실을 부인했고, 아들의 신사 앞 결혼식도 비용 절감을 위해서였다고 변명하였다. 또한 표창을 받았다거나 국방헌금 납부를 독려하였다는 사실도 부인하였다.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해체되어 처벌은 받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1938년 『매일 신보』에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재인식」, 「융합적 정신과 진절 정녕을 희망」을 기고하였다.
[상훈과 추모]
1930년 4월에 훈8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32년 10월에는 조선 쇼와 5년 국세 조사 기념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