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263 |
---|---|
영어의미역 | Kiln for Baking Roof Tiles |
이칭/별칭 | 와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견된 통일 신라부터 조선 시대까지 기와를 굽던 가마.
[개설]
기와 가마는 건물의 천장 부재인 기와를 굽기 위해 만든 시설물을 지칭하며, 기와가 사용되기 시작한 삼국 시대부터 현재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인 기와 가마는 불을 지피는 아궁이, 말린 기와를 굽기 위해 놓는 소성실, 연기와 열이 나가는 굴뚝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기와 가마는 소성실 바닥이 경사진 등요(登窯)와 편평한 실요(室窯)로 구분된다. 등요는 주로 구릉의 경사면을 파고 만드는데,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해 아궁이 쪽이 낮고 소성실과 굴뚝으로 가면서 경사져 올라간다. 가마를 구릉 경사면에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사를 이용해 높은 온도를 올리기 위한 것이다. 실요도 주로 구릉 사면에 만들지만, 경사도가 약한 곳에 만든다. 아궁이 바닥은 낮게 하고, 소성실은 바닥을 편평하게 만들며, 굴뚝은 경사져 올라가는 구조이다. 등요가 대부분이고, 실요는 발견된 사례가 아주 적다.
[분포와 형태]
부산 지역에서도 기와 가마는 여러 곳에서 상당수 조사되었다. 부산 지역의 기와 가마터는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임석 유적에서 2기, 기장군 기장읍 삼성리 아시안 게임 경기장 부지에서 3기, 삼성리 기와 가마터에서 7기, 기장군 철마면에 있는 고촌리 유적에서 6기 등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기와 가마는 모두 18기이고, 대부분 기장군 관내에 분포한다. 조사된 18기의 가마 중 통일 신라 시대의 것은 고촌리 유적에서 2기가 확인되었고, 이외의 가마는 모두 조선 시대의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기와 가마는 길이가 500㎝ 내외이고, 너비가 160㎝ 내외로 규모가 작은 소형이다. 아궁이와 소성실의 경계는 단이 있고, 높이는 40㎝이다. 가마의 수가 적고, 규모가 소형인 점으로 볼 때, 기와 생산이 활발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고려 시대의 기와 가마는 고촌리 유적에서 6기가 확인되었으나 보고가 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의 기와 가마는 구릉 경사면에 수기가 인접해서 나란하게 조영된 예가 많은데, 임석 유적·삼성리 기와 가마터·삼성리 아시안 게임 경기장 부지 등에서 발견된 기와 가마는 2기·3기·7기가 모여 있다. 또한 기와 가마의 전체 길이가 10~13m이고, 너비가 1.8m 내외로 클 뿐만 아니라 소성실의 규모가 커진 것이 특징적이다. 소성실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생산량이 증가되었음을 나타낸다. 가마의 구조도 재를 버리는 회구부, 아궁이, 소성실, 굴뚝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고, 굴뚝 뒤쪽에 배수구를 설치한 경우도 있다.
[의의와 평가]
기와 가마의 존재는 기와를 이은 건축물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며, 같은 시기에 기와 가마가 여러 곳에서 집중되어 조업한 점은 그만큼 기와 수요가 많았음을 나타낸다. 특히 기장 지역에서 조선 전기 때 사용된 기와 가마가 다수 확인된 것은 이 시기 기장읍성(機張邑城) 내의 관아와 함께 기와로 지붕을 인 와즙(瓦葺) 건물의 수가 많았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