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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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官加耶 |
영어의미역 | Geumgwan Gaya |
이칭/별칭 | 가락국,남가라,남가야,금관국,본가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백승충 |
[정의]
삼국 시대 부산 및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 발전한 가야의 한 소국.
[개설]
금관가야(金官加耶)는 ‘9간 사회(九干社會)’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화의 기반 위에 성립하여, ‘수로왕(首露王)’으로 상징되는 철기 문화를 소유하고 이른바 ‘전기 가야’의 맹주 국가로서 부산의 독로국[혹은 거칠산국]을 비롯한 여러 가야 소국을 통솔하는 나라로 성장하였다. 문헌 사료를 통하여 금관가야는 인접한 신라와 때로는 교섭하고, 때로는 쟁투를 벌이며 발전해 가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 및 대방군과 교섭하였으며, 바다 건너 왜와도 교류하였음이 고고학적 유물을 통하여 입증되고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철의 왕국’이라든지 ‘해상 왕국’이란 바로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건국 신화와 부산]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금관가야의 건국과 시조 수로왕에 관한 이야기가 신화 형태로 전하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즉 9간이 통솔하던 김해 지방에 수로(首露)가 하늘에서 내려와 42년에 왕이 되었는데, 그 후 수로왕은 왕의 자리를 넘보던 탈해(脫解)를 기이한 술수로 쫓아내고 왕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으며, 배를 타고 찾아온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아 나라를 통치하다가 199년 1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이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는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부산 지역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부산 지역 또한 금관가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단편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수로왕과 탈해의 왕위 쟁탈전에 보이는 탈해의 이동 경로가 그것이다.
건국 신화에는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으로 오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라가 금관가야를 침공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탈해의 출자(出自)는 지금의 울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울산에서 바다를 따라 김해로 침공해 들어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산을 경유해야만 한다.
수로왕은 탈해의 항복을 받고 뱃길로 도망가는 탈해를 추격하였는데, 탈해가 “계림의 영토 안으로 도망하니” 돌아왔다고 한다. 탈해의 도주로는 금관가야 침공로의 역방향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계림이란 신라이며 그의 본거지인 울산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결국 김해와 울산 사이에 있는 부산은 금관가야의 영역권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와 같은 사실을 방증하는 자료를 또한 건국 신화에서 찾을 수 있어 주목된다.
건국 신화는 즉위 직후 수로왕이 신하들에게 “이 땅이 여뀌 잎처럼 협소하기는 하나, …… 이 땅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이 됨에서랴고 하였다” 한다. 여기서 ‘강토의 개척’이란 곧 주변의 소국들을 아울러 금관가야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의지의 발로이다. 편입 대상이 반드시 부산 지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탈해의 이동 경로와 결부해 보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금관가야의 변천과 부산]
금관가야의 성장과 발전을 문헌적 고찰만으로는 어렵다. 비단 금관가야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그 이유는 사료의 영세함 때문임이 주지하는 바와 같다. 금관가야의 정보를 가장 잘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료인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차 건국 신화, 제의(祭儀), 계보(系譜) 등에 대해서만 간략히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970년대 이후부터 김해 예안리 고분군(金海禮安里古墳郡), 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良洞里古墳群),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 등 꾸준한 발굴 성과가 축적된 결과 금관가야의 중심지가 김해이었음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 가운데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경우, 유적의 입지·매장 주체 시설의 규모·부장품의 질과 양 등 모든 면에서 주변 지역을 월등하게 압도한다는 점에서 축조 집단이 금관가야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부산의 경우이다. 부산의 가야 유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福泉洞古墳群)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입지·규모·출토된 유물 등의 측면에서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곧잘 비교되는데, 이 두 유적은 ‘외절 구연 고배(外折口緣高杯)[아가리 부분이 바깥으로 굽은 굽다리 접시]’라는 지역성이 강한 토기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 같은 까닭으로 몇몇 학자들의 경우, 금관가야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축조 집단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축조 집단 간의 ‘정치 연합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부산은 금관가야를 구성하는 한 축이었다는 뜻이다. 즉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비해 덩이쇠[鐵鋌]의 소유량, 순장인(殉葬人)의 수, 굴대두겁[筒形銅器]의 출토 양 등에서 열세를 보이기 때문에 정치 연합에서 더 하위(下位)를 이룬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축조 집단의 경우,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축조 집단으로부터 이른바 ‘수장권(首長權)’은 보장받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5세기 전반이 되면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이른바 ‘왕급 무덤’의 축조가 중단된다. 이는 김해 지역에서 대성동 고분군 축조 집단으로 상징되는 지배자 집단의 소멸을 의미한다. 반면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경우 지배자의 분묘가 계속해 축조되고 있으며, 나중에는 묘역(墓域)이 부족해지자 인근의 연산동 고분군(蓮山洞古墳群)으로 묘역을 옮겨 금관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 전반까지 축조된다.
이 같은 현상은 5세기 전반 이후 약 100년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축조 집단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축조 집단을 대신하여 금관가야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던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즉 금관가야의 패권이 김해 지역에서 부산 지역으로 옮겨 왔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부산은 금관가야 후기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향후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근본적으로는 금관가야의 중심 고분군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축조 중단에 대한 의미 부여와 이후의 김해 지역 고분군의 분포 양상에 대한 더욱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금관가야의 멸망과 부산]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삼국유사』에 의하면,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에 멸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두 사료에 나타나는 멸망 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의 경우 금관가야가 자발적으로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의 경우 금관가야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우리나라 사서보다 3년 정도 앞서는 529년의 시점에 신라가 금관가야를 침공하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 같은 사료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하여 대체로 ①『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편년 기사를 둘 다 인정하여 529년에 금관 4촌이 함락되고 532년에 그 왕이 투항하였다는 설 ②『일본서기』의 편년상 3년 오차를 지적하면서 이를 수정하여 『삼국사기』의 기년에 맞추어 4촌 함락과 금관가야 국왕의 투항을 모두 532년의 사건으로 보는 설이 양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라의 상신(上臣)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이사부(異斯夫)]가 금관(金官)·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의 네 마을을 초략하기 위하여 다다라(多多羅)에 석 달 동안 주둔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다다라’가 주목되는데, 지금 부산의 다대포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다다라가 지금의 다대포가 틀림없다면, 신라는 이미 529년 이전부터 부산을 자신의 영역에 편입하였던 것이며, 결국 부산은 신라의 금관가야 진출의 교두보 구실을 한 셈이 된다. 즉 신라는 낙동강 하류로 진출하는 데 적어도 해로로는 먼저 부산을 점령하였고, 이를 발판으로 김해를 편입함으로써 532년 금관가야를 완전히 병합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