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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악법 반대 투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012
한자 二大惡法反對鬪爭
영어의미역 Struggle against Two Bad Laws
이칭/별칭 집회시위규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안,데모규제법,임시반공특벌법,반공특례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 운동
관련인물/단체 반민주악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1년 3월 13일연표보기 - 2대 악법 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 결성
종결 시기/일시 1961년 4월연표보기 - 2대 악법 입법 무산
발단 시기/일시 1961년 3월 - 2대 악법 발의
전개 시기/일시 1961년 3월 15일 - 2대 악법 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1년 3월 23일 -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 주최 2대 악법 반대 성토 궐기 대회
전개 시기/일시 1961년 3월 24일 - 경남상업고등학교 100명 횃불 데모
전개 시기/일시 1961년 3월 25일 - 부산상업고등학교 1,000명 2대 악법 반대 데모
전개 시기/일시 1961년 3월 25일 - 경남공동투쟁위원회 주최 2대 악법 반대 시민 궐기 대회 개최
발생|시작 장소 부산광역시 중구

[정의]

1961년 부산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에서 전개된 악법 반대 투쟁.

[역사적 배경]

1961년 3월 초 장면(張勉) 정권이 집회시위규제법[통칭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례법」을 제정하려 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를 민주화 운동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긴 민주 세력은 전국적인 반대 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경과]

1961년 3월 13일 부산 지역의 혁신 정계와 진보적 청년계 및 학생층이 주도하여, ‘반민주악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약칭 경남공투위]를, 3월 15일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약칭 경남학생공투위] 결성하였다. 2대 악법 반대 투쟁에는 특히 학생층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는데, 그간 부산 지역 대학가의 학생 운동을 주도했던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고 여기에 고등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23일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가 부산역전 광장에서 개최한 ‘반공 법안 및 데모 규제 법안 반대 성토 궐기 대회’에는 6,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였다. 3월 25일 반민주악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가 부산역전 광장에서 주최한 ‘2대 악법 반대 시민 궐기 대회’에는 3,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했으며, 4월 13일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가 부산시 중구 중앙동의 노동 회관 앞에서 개최한 ‘2대 악법 반대 성토대회’에는 남녀 고교생 1,500여 명이 참여하였다.

대회에서는 혁신 정계, 청년계, 고등학생과 대학생 대표들이 연사로 나섰다. 이들은 2대 악법이 장기 집권을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실업자를 구하고 민생고를 덜어줄 것을 장면 정부에 호소하였다. 대회를 끝낸 후 이들은 가두 행진을 벌이고, 민주당 경남도당 사무실, 경상남도청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며 2대 악법 철회를 요구하였다. 이외에 3월 24일 경남상업고등학교[현 부경고등학교], 25일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학생들이 개별 학교 단위로 2대 악법 반대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2대 악법 반대 투쟁에는 지역 노동계도 적극성을 보였다. 부두 노조, 철도 노조, 교원 노조, 섬유 노조, 화학 노조 연맹, 자동차 관계 노조가 중심이 된 경남노동조합 산하 80여 개의 단위 노조는 ‘2대악법반대 경남노련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시민 궐기 대회 개최를 계획하였다. 노동계는 2대 악법이 노동 운동에 부당하고 가혹한 간섭과 파괴를 초래할 것으로 여기고 저지를 위한 적극적 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한국노련 중앙본부의 이해할 수 없는 철회 결정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과]

전국적인 반대 여론으로 결국 장면 정권은 2대 악법 제정을 포기하였다. 하지만 5·16 쿠데타 이후 소위 ‘혁명재판소’에 의해 2대 악법 반대 투쟁은 ‘특수 범죄’로 단죄되어, 선두에서 반대 투쟁을 주도한 학생층은 기소되어 처벌받았다.

[의의와 평가]

2대 악법 반대 투쟁은 7·29 총선 과정에서 사분오열된 혁신 정치 세력과 진보 세력이 통일 운동의 과정에서 다시 결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부산에서도 장면 정권의 탄압에 위기의식을 느낀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통일사회당 등 혁신 정계의 통합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2대 악법 반대 투쟁은 혁신 정당과 민주민족청년동맹 부산경남맹부,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 대학 민족통일연맹 등 진보 세력이 결속하여 통일 운동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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