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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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의미역 | Castle |
이칭/별칭 | 성,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나동욱 |
[정의]
부산 지역에서 군사·행정적인 집단이 일정한 활동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축조한 구조물.
[개설]
성곽은 엄밀하게 구분하면 내성(內城)인 성(城)과 외곽(外郭)인 곽(郭)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 성곽의 기원에 관하여서는 대체로 고지성 집락(高地性集落)[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구릉의 고지에 형성된 마을]에 설치한 방어 시설인 환호(環壕)[주거지의 외곽을 따라 두른 도랑의 방어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에 신석기 시대 진주 남강 유적의 주거지 발굴에서 주거지 외곽에도 환호가 둘러진 것이 조사되었다.
문헌에 보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곽은 중국 역사서인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보이는 위만 조선(衛滿朝鮮)의 도성(都城)인 왕검성(王儉城)으로, 최소한 기원전 5세기 또는 4세기 이전에 이미 성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 ‘한전(韓傳)’에도 3세기 전후 우리나라의 성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변천]
정복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4세기경에는 석축의 산성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특히 삼국 간의 국경을 이루던 지역에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다. 거창 거열산성, 함안 성산산성, 거제 폐왕성, 김해 분산성과 양동산성, 부산 배산성 등 부산 및 경상남도 지역의 고대 석축 산성은 대부분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축조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부산 지역의 판축 토성(版築土城)[기둥과 판자 등으로 짠 틀에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다지는 방법으로 만든 토성]인 동래 고읍성지를 비롯하여 동평현성 터[당감동성 터], 기장 고읍성지 등은 발굴 조사 결과 축조 시기가 통일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 성지는 각각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보이는 동래현과 그 속현(屬縣)[중심 현에 딸려 있는 현]인 동평현, 기장현의 중심 성으로, 이때부터 읍성(邑城)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부산 지역은 삼국 시대부터 왜의 침입이 잦은 곳이어서 많은 방어 시설물이 축조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남아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太宗) 때부터 왜구와 관련하여, 경상도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부산포(富(釜)山浦)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11개의 만호영(萬戶營)을 두었다. 1485년(성종 16) 이후에는 다대포진, 부산진, 두모포진, 개운포진 등 주요 포구를 중심으로 수군의 진성(鎭城)이 다수 축조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인 수영(水營)이 울산 개운포에서 옮겨 오면서 1895년(고종 32) 7월에 군제 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243년간 부산에 있었다.
특히 부산을 비롯한 동남해안 지역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축성한 왜성(倭城)이 30여개 있다. 부산에는 임랑포 왜성, 기장 죽성리 왜성, 동래 왜성, 자성대, 구포 왜성, 김해 죽도 왜성, 가덕도 성북 왜성, 증산 왜성, 동삼동 왜성 등과 이들을 지원하는 소규모의 성을 포함하여 10여 개가 축조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구의 대규모 침입에 대비하여 1703년(숙종 29)에는 전국에서 가장 긴 부산 금정산성(釜山 金井山城)이 축조되었고, 1731년(영조 7)에는 임진왜란 때 파괴된 동래읍성(東萊邑城)을 다시 넓혀 쌓았으며, 1881년(고종 18)에는 국방상 영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절영도진을 설치하고 성을 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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